이철희 논설위원
‘스위스 보이’의 놀이동산
요즘 인기 있는 미드 중에 ‘웨스트월드’라는 SF 드라마가 있다. 인공지능(AI)이 발달한 미래, 하루 5만 달러면 19세기 서부 총잡이 시대를 재현한 테마파크에 갈 수 있다. 거기엔 사람과 똑같이 생기고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는 AI 주민들이 있다. 외부 손님은 그들을 상대로 마음껏 살인하고 학대하고 심지어 강간까지 한다. 노리갯감이 AI 로봇인 만큼 손님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권좌에 오르자마자 김정은은 놀이동산 재건에 들어갔다. 유원지, 스키장 같은 위락시설을 다시 꾸미고, 미녀 걸그룹도 만들었다. 괴짜 농구 스타를 불러와 경기도 열었다.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리려는 ‘피터팬 콤플렉스’였으리라. 굶주림에 허덕이는 인민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아니, 이런 현실 대신 인민들에게 허상을 보여줌으로써 위안을 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김정은이 깨달은 것은 자신의 권력이 가진 크기였다. 처음엔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흉내 내는 ‘수령 놀이’ 역할극이었지만, 금세 거기에 어떤 한계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제왕의 무치(無恥)를 넘어선 수령의 파렴치(破廉恥)를 너무 쉽게 배웠다. 최측근은 물론 고모부까지 고사총으로 쏘아 날려버려도 수령의 권력은 더욱 커갈 뿐이다. 그에 비례해 불어난 체중 탓에 다리를 절뚝거릴 지경이지만 브레이크는 없다.
이렇게 5년. 배다른 형을 처리하는 문제는 이미 오래전에 내린 명령이다. 헌데 하필 이때, 신형 미사일로 태평양 건너 새 미국 대통령의 심중을 떠보려는 참인데 일이 터졌다. 뒤처리도 깔끔하지 못했다. 모든 이들이 날 손가락질할 텐데, 혹시 누군가 날 골탕 먹이려고 이렇게 허술하게 일을 벌인 건 아닐까? 김정은이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잔칫상 앞에서 성난 표정으로 초점도 없이 허공을 노려본 것은 이런 복잡한 속내 때문 아니었을까.
부메랑이 된 ‘몽상’ 코드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