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68년째 타향살이’ 장제스 국민당 93사단의 후예들
장제스(蔣介石) 전 총통의 국민당이 패퇴해 대만으로 쫓겨 가면서 중국이 양안(兩岸)으로 갈라진 지 68년이 됐다. 하지만 아직도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떠돌았던 국민당 군대의 잔당인 ‘고군(孤軍·고아가 된 군대)’의 후예들이다.
규모도 가장 크고 대표적인 고군은 미얀마, 라오스와의 접경 지역인 태국 북부 치앙라이 주 매살롱에 살고 있는 국민당 8병단 93사단 후예들이다. 동남아 각국에는 국민당 군대의 후예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치앙라이 여행을 다녀온 중국인들이 늘어나면서 “왜 우리 국민을 이렇게 방치하고 있느냐”는 동정론이 일고 있다.
[1]대만 국민당군 93사단의 후예들은 태국 북부 치앙라이에 살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민족촌을 지어 자신들이 흘러 들어와 살게 된 사연 등을 기록해 보존하고 있다.[2]한 집의 지붕 아래 걸린 현수막에 ‘고아가 우리의 이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꿈속에서 부른다’는 애절한 글귀가 걸려 있다. 바이두 제공[3]태국 북부 치앙라이 주 매살롱의 산악지대 길가에 관광객을 상대로 한 노점들이 들어서 있다. 바이두 제공
윈난(雲南) 성 출신을 위주로 편성된 윈난 성 8군의 일부가 홍군에 밀려 미얀마로 쫓겨 간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석 달여 만인 1950년 1월이다. 이들은 미얀마와 태국 접경지대 등에서 활동하던 국민당 항일원정군과 합쳐 93사단으로 재편됐다. 이들은 중국 땅에서 밀려나 제3국에 머물면서 마치 독립군처럼 ‘대륙 광복’을 꿈꿨다.
미얀마 정부는 국경 안으로 들어온 국민당 군대 잔당 세력을 몇 차례 토벌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미얀마 정부는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던 대만에 압박을 가했다. 유엔 결의와 세계 여론에 못 이긴 장제스 총통은 1953년 11월부터 1954년 6월까지 93사단 6750명에게 철수령을 내린다. 이어 1960년대 초까지 추가로 4406명이 대만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5000여 명은 현지에 남았다.
이들은 미얀마에서 태국 국경을 넘나들다 태국 북부로 터전을 옮겼다. 태국도 처음에는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수적으로 몇 배 우세해도 ‘역전의 전사’들을 당해 낼 수 없었다. 93사단 잔당 부대원들은 현지 정착을 위해 태국 정부에 협조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1970년대에는 태국 북부의 ‘공산군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1982년 완전히 공산군 빨치산을 진압한 태국 정부는 93사단 잔당이 큰 공을 세운 사실을 인정해 이들에게 태국 국적을 부여했다. 다만 거주지는 일정 지역으로 제한했다.
산간벽지에서 부르는 망향가(望鄕歌)
2000년 국민당 장기 집권을 끝내고 집권한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전 대만 총통은 93사단 노병과 후예의 대만 입국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또 이들이 대만에 들어오면 검거해 형사처벌하기까지 했다.
93사단 병사와 그 후예들을 중국 당국이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국민당 부대 소속이었으니 대만이나 국민당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하나다. 중국인이 되고 싶었다면 먼저 명확히 투항 선언을 하고 총을 내려놓은 후 대륙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도 이유로 꼽힌다.
하지만 중국 언론은 이미 국공 내전도 끝난 지 60여 년이 된 지금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과거 93사단 부대원들이 태국 미얀마 라오스의 3국 접경지역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오랜 기간 마약을 재배하고 거래한 전력이라고 지적한다. 단순히 국민당 잔당 병사와 그 후예라는 이유만이라면 국적 취득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이들을 받아들여 고향으로 돌려보낸다면 중국이 강조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실천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지키려는 ‘작은 윈난 매살롱’
매살롱에 살고 있는 고군의 후예들은 제한된 거주지에서 살면서 차를 재배하거나 중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매살롱은 치앙라이 주 우롱차 재배의 80%가량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일부 주민이 마약 재배 및 판매에 관여했다. 해발 1800m의 고산지대라 양귀비 재배에 적격이었다. 지금은 마약 재배지를 모두 갈아엎어 차 밭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현지에 93사단 박물관이나 민족촌 등을 지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윈난 성에서 내보내는 TV방송이 잡혀 주민들이 즐겨 본다고 한다. 매살롱이 ‘작은 윈난’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은 위성 방송을 통해 항상 고향을 그리며 살고 있다고 현지를 다녀온 관광객들은 전한다.
이들이 아직 번체자(간략화되지 않은 한자)를 쓰고 있는 것은 대만 국민당 군대 잔당이어서가 아니다. 중국에서 1960년대에 간체자를 사용하기 전에 중국 대륙을 떠났기 때문이다.
2006년 1월에는 기존 ‘흥화학교’를 ‘매살롱 중화중학’으로 새롭게 개편했다. 93사단의 군인과 가족들을 이끌고 매살롱에 정착하도록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은 돤시원(段希文) 장군이다. 흥화학교도 돤 장군이 설립했다. 매살롱 곳곳에 돤 장군의 성을 딴 카페와 호텔 식당이 남아 있다.
같은 중국인 동포 관광객에게 ‘구명’ 호소
매살롱은 1994년부터 관광지로 개발됐다. 태국 정부는 ‘산띠키리’라는 새 이름도 지어 주었다. ‘평화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태국을 방문하는 중국 단체 관광객 중 북부 오지까지 가는 일부 관광객이 이들의 거주지를 찾는다. 이들은 자신들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고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한다.
이들은 과거에는 ‘반공 군대’였으나 지금은 옛날이야기라고 강조한다. 고향인 윈난 성 등으로 돌아가 중국 국적을 회복하고 싶다고 말한다. 매살롱 곳곳에는 ‘우리의 이름은 고아, 우리의 희망은 고향 돌아가는 것’ 등의 호소문이 붙어 있다. 이들을 만난 중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선 “왜 중국인을 이처럼 방치하느냐”는 반응이 많다고 한다. 관광객들은 “세계 2위 강대국인 중국이 수천 명의 국민을 타국에 내버려 두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불만을 나타내기도 한다. 3년 전 이곳에 다녀왔다는 마(馬)모 씨는 “같은 중국인끼리 누구는 관광의 대상이 되고, 누구는 관광객이 되고 있는 상황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이제는 대국이 된 중국이 나서 국공 내전의 상처를 치료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