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박지향
박지향 교수는 “청년층 일자리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무원 수를 늘려 실업자 수를 줄이겠다는 주장은 허망하다”며 “일자리 창출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니 기업이 그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정부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게 진정한 정부의 역할”이라고 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허문명 논설위원
나라 흔들릴 정도 위기 아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묻자 “내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고 있는지, 맡은 책무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의외로 담담한 대답이었다.
“지금 사태가 예전 정부들의 스캔들보다 더 심각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대통령들보다 정치력이 부족한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문제가 더 커졌다고 본다. 그렇지만 나라가 흔들릴 정도의 위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 대통령의 몰락은 보수의 몰락인가, 개인의 몰락인가.
“박 대통령 잘못이 크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본인이나 친박(친박근혜)들이 크게 반성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보수의 몰락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 정당의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에 생긴 비극이다.”
―왜 영국 보수를 탐구하게 됐나.
“한국 사회가 보수주의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해 보여서다. 보수 하면 그저 막연하게 기득권의 수호, 지금 있는 것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태도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절대 그런 게 아니다.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건데 이거야말로 오해다. 보수주의는 절대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과감히 변화를 추진해왔다. 문제는 방법과 속도다. 너무 급격하고 전통과 현실을 무시하는 변화에 반대할 뿐이다.”
―한국의 보수와 영국의 보수는 어떤 차이가 있나.
“한국 보수는 그저 기득권의 수호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틀린 말 같지 않다. 영국 보수당은 끊임없이 개혁하고 변신해왔다. 시대정신을 잘 파악하고 거기에 끌려가지 않고 앞장서 이끌었다. ‘보수’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것을 보존하는 것에 멈추지 않았고 어떤 때는 다른 정파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을 이끌었다. 최초의 유대인 총리와 최초의 여성 총리를 배출한 것도 보수당이었다. 19세기 산업화 이후 빈부격차가 심해지자 ‘두 개의 국민들’이 생겼다며 엘리트의 책임의식,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한 것도 보수당이었다. 한국의 보수정당은 지키려는 가치가 뭔지, 지향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선명하지 않다. 있더라도 반대여론에 휩싸이면 금방 바꾼다. 영국 보수당은 자신들이 가진 핵심 원칙들을 버린 적이 없고 그 원칙이 다소 국민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있더라도 밀고 나갔다. 지속적으로 국민들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는 이 대목에서 영국 보수당의 전통을 만든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말한 “오두막이 행복하지 않으면 궁전도 안전하지 않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늙고 가난하고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그의 철학은 ‘하나의 국민’이란 전통으로 이어져 초기 복지사회의 틀을 만들었다”고 했다.
―영국 보수당이 ‘국민들이 오해하더라도 밀고나간 가치’의 예를 들면?
“대표적으로 ‘평등’이라는 매우 중요한 주제에 대한 접근이 잘 보여 준다. 영국 보수당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불평등을 옹호하는 것’이다. 언뜻 듣기에 용납할 수 없는 입장인 것 같지만, 영국 보수당이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결과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이다. 사회주의자들은 평등은 필연적이고, 불평등은 우연적이라고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불평등을 인간 사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노래를 잘하고 누구는 운동을 잘하듯 인간의 재능은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법과 선거권의 평등은 받아들이지만 재능과 부의 불평등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게 보수주의다.”
그는 “적어도 영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이런 주장에 공감했기 때문에 보수당이 그처럼 오래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라며 “우리 보수정당들은 이런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 어떤 원칙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막연한 평등주의에 겁먹고 주눅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분단 상황 등 한국은 영국과 많은 차이가 있다. 한국의 보수도 고유한 특징이 있다고 보는데….
―한국에서는 보수정치가 뿌리를 내렸다고 보나.
“보수의 가치 정립과 진정한 보수정당의 출현은 아직 미완성이라고 생각한다. 정립 과정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보수정당은 광복 후 서구 정치제도가 도입될 때 전통사회 양반층의 지배구조와 혼합되어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원이 누군지도 불명확하고 당원 중심의 당내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고 있다. 보스를 중심으로 정파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에선 정당들이 자생적으로 태동해서 형성되고 발전된 것이 아니고 광복 후 이식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외생적으로 생겼기 때문에 영국의 근대 정당처럼 발전하지 못했다.”
보수의 최고 미덕은 애국심이어야
―한국 보수에게 가장 필요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나.
“‘깨끗한 보수, 따뜻한 보수, 도덕적 보수’라는 과제를 말하고 싶다.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은 ‘따뜻한 보수’인데, 그것은 우리 사회 소위 ‘진보’가 주장하는 것처럼 국가가 나서서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문재인 전 대표가 공무원을 80만 명 증원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80만 명에게 아부하는 대신 세금을 납부하는 수백만 명을 배신하는 행위다. 국가는 사회 곳곳에서 공정한 룰이 지켜지고 있는지 감시하고 더 많은 기회가 창출될 수 있게 제도를 개혁하고 보완하는 등의 역할만을 해야 한다. 박정희 시대의 소위 개발독재를 그처럼 혐오하는 진보 인사들이 더 큰 정부, 더 많은 통제를 주장하는 것은 역설이다.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더 많이 양보하고 베풀 줄 알아야 한다. 가진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싸우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보수의 현재 모습이다.”
―영국 보수는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데 왜 한국엔 젊은 보수 지도자가 보이지 않나.
“대학의 풍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의 대학에는 좌파 단체만이 아니라 우파 단체들도 존재하고 활발히 활동한다. 마거릿 대처도 옥스퍼드대에 다닐 때 보수단체 회장을 맡았다. 우리 대학의 분위기는 우파를 죄악시한다. 우파 성향인 학생들은 감히 발언을 못 하고 조직화는 엄두도 못 낸다. 이런 풍토가 사라지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한국 정치 지도자들은 보수와 진보를 통합하겠다고 말한다. 이게 가능하다고 보나.
“가치관과 원칙이 다른데 어떻게 통합이 가능하겠는가? 선의의 경쟁 체제로 가야 한다. 국민들이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를 선택하게 해야 한다. 영국인들은 경제와 국가방위에서는 보수당이, 복지제도에서는 노동당이 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경제와 안보가 더 중요한 이슈인지, 복지가 더 중요한 이슈인지는 달라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 경영 능력이다. 영국 보수당은 이런 점에서 국민들에게 계속 신뢰를 주어 왔다.”
박 교수는 “역사를 들여다봐야 미래에 대한 낙관을 가질 수 있다. 지난 역사를 보면 지금보다 더 어려울 때도 많았다”면서 “대한민국은 현재의 위기를 잘 극복할 것”이란 희망의 메시지로 대화를 맺었다. 폴리페서들이 대선판에 수두룩한데 지식인의 본분을 지키는 그의 모습에서 보수의 저력과 뚝심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