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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석의 시간여행]‘무정’ 100주년, 한국 출판계

입력 | 2017-02-27 03:00:00


길을 가며 책을 읽는 86년전 3월 1일의 청년 학도. (동아일보 1931년 3월 2일자)

“책은 정신의 양식. 요사이 청년들은 주로 어떠한 서적과 잡지를 보는가. 시내 각 서점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적은 사상서와 문예서가 많이 읽힌다. 잡지는 일본에서 발행하는 ‘개조(改造)’가 가장 인기.”(동아일보 1921년 12월 27일자)

먹을거리 못지않게 읽을거리도 변변치 않던 시절, 한 해의 독서계를 돌아보는 96년 전 기사다. 당시의 청년 학도와 지식층의 주된 화두는 ‘개조’였다.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절박감, 그를 위한 자각과 자기 개혁, 그를 뒷받침할 교육과 문화의 함양. 일본의 유력 월간지 ‘개조’는 그 제호부터 조선인의 지적 갈증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해 조선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일본 서적은 사회주의 계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사선을 넘어서’. 판매량이 1만 부를 넘었는데, 서울 인구 20만 명 시절의 수입 원서로는 대단한 부수였다. 그러면 조선 책은? 최초의 기업형 출판사를 표방하며 갓 출범한 한성도서주식회사의 영업부 주임의 말.

“우리 출판사에서 금년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은 화류계 창가올시다.”

요즘 말로 번역하자면 유행가 모음집 격이다. 그와 경쟁할 만한 것은 족보책 정도였다.

“조선에서 책을 발간하면 1년 안에 재판 찍기 어려운데, 화류계 창가는 벌써 4, 5판을 발행하였습니다.”

당시 춘원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 문단(文壇)은 문단이라기보다 작문(作文)단, 조선 문사(文士)들은 문사라기보다 문학청년… 그렇게 조롱한다. 외국인이 아니라 우리 동포 스스로가.”(1925년 1월 1일자)

조선에 현대문학이 개시되고 그 첫 번째 봉우리가 형성되었다고 할 만한 1924년 한 해를 돌아보며 신문학의 성과를 평가하는 자리였다.

‘이제 겨우 십수 년 된 짧은 역사의 조선 문단을 수백 년 된 서구의 문단이나 사오십 년 된 일본의 문단과 비교하여 조롱함은 단견이다. 오늘날 우리 소설의 신문체가 성립한 것은 불과 10년 내의 일이다. 이 짧은 시간에 이만한 자유로운 문체를 이루게 된 것은 실로 경이로운 진보라 하겠다. 일본 문학에서도 30년 넘게 걸린 일이다.’

그렇게 우리 문학을 옹호하면서 춘원은 단언한다.

‘문체뿐 아니라 묘사의 수완이며 재료 선택이며 구상과 기교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적어도 소설 하나만은 일본 문학에 지지 아니하리라고 믿을 만한 진보를 하였다. 현진건 염상섭 나도향 전영택 김동인 여러 분의 작품 중에 어떤 것은 일어나 영어로 번역하여 내어놓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다고 믿는다. 이 작가들은 거의 다 스물서너 살에 불과함을 생각할 때, 또 외국 작가들 모양 선배 대가에게 다년간 연구와 훈련을 받음도 없음을 생각할 때, 그 역량의 비범함을 찬탄 아니 할 수 없고 우리 소설의 장래가 유망함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한국의 소설과 출판은 성장해 오늘에 이르렀다. 춘원이 최초의 현대 장편 소설 ‘무정’을 발표한 지 100주년. 올해 벽두부터 서적 도매상의 부도로 소형 출판사들은 도탄에 빠졌고, 대형 출판사들은 지난 주말 출시된 일본 인기 소설의 번역 판권 따낼 전략에 부심하는 중이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