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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성호]카피캣 코리아

입력 | 2017-02-28 03:00:00


이성호 사회부 차장

한때 대한민국이 이렇게 불렸다. 잘나가던 미국과 일본 제품을 베끼는 게 유행이었다. 품질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일등의 위상까지 베끼진 못했다. 기업도 한국도 카피캣, 즉 모방꾼의 이미지를 뒤집어썼다.

이제 세계시장에서 카피캣으로 불리는 한국기업을 찾기가 쉽지 않다. 과거 한국기업에 따라붙던 카피캣 명성은 후발주자인 중국기업들이 넘겨받았다. 어느덧 한국은 혁신국가 1위(블룸버그 혁신지수)가 됐다. 과거 일본을 대놓고 따라하던 한국의 대중문화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넘본다. 이쯤 되면 카피캣 코리아라는 오명을 벗어던져도 될 법하다.

그런데 요즘 정부가 철 지난 카피캣 행태를 따라하고 있다. 내수 활성화를 위한다며 내놓은 블랙 프라이데이와 프리미엄 프라이데이가 그렇다. 블랙 프라이데이는 11월 마지막 금요일 시작하는 미국 최대의 쇼핑행사, 프리미엄 프라이데이는 24일 일본에서 시작된 ‘금요 조기 퇴근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아닌데 한국판이라는 이름이 붙어 국내에 도입됐다.

정책 신선도는 제로인 셈이다. 물론 모든 카피캣이 잘못은 아니다. 베끼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고치고 배우는 것이 있다. 삼성전자를 보면 안다. 한때 애플의 카피캣으로 불렸지만, 이제 삼성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정부의 역할이란 게 비슷하니 정책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2015년 가을 처음 실시한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는 그 나름의 효과가 있었다. 마뜩잖은 기업들의 등을 떠밀어 참여시키면서 재고떨이 행사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소비절벽 직전에 반짝 효과가 있었다. 정부는 프리미엄 프라이데이를 통해서도 적잖은 효과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내수 활성화라는 목표만 같을 뿐 두 정책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기대만큼의 효과를 얻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정부와 국민의 시선 차이만 봐도 분명하다. 프리미엄 프라이데이 정책을 내놓으면서 정부는 금요일 2시간 조기 퇴근을 강조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근로자는 월∼목요일 30분 연장근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연간 근로시간 2113시간(2015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위에 빛나는 근로자들이 평일 30분 야근 추가에 발끈한 건 당연한 일이다.

정부는 억울할 수 있다. 정권 말, 게다가 탄핵정국 속에서 복지부동이 당연한 게 요즘 공직사회 분위기다. 이거라도 하는 게 어디냐고 항변할 수 있다. 나름대로 창의성을 가미한 ‘벤치마킹’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일본처럼 무조건 금요일에 조기 퇴근이 아니라 평일에 야근을 더 하는 걸로 바꿨기 때문이다. 어쩌면 근로자와 기업 모두를 만족시킨 정책이라며 자화자찬했을지도 모른다.

2월 임시국회에서 정부가 추진한 근로시간 단축안 통과가 무산됐다고 한다. 주당 최대 근로시간을 68시간에 52시간으로 줄이는 내용이다. 여야의 이해관계 탓도 크지만 정부도 그리 적극적이지 않아 보인다. 정권 초부터 밀어붙여도 쉽지 않은 정책이라 내심 큰 기대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근로시간 단축은 철저히 근무환경 개선과 생산성 향상이라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도 실현까지는 수많은 걸림돌이 있다. 법적 근거도 없이 여기저기에 선심 쓰듯 남발할 수단이 아니다. 내수 활성화에 끼워 맞춘 프리미엄 프라이데이는 그저 근로자와 기업 모두에 칭찬도 욕도 먹지 않겠다는 정책으로 보인다. 차라리 법대로 ‘칼퇴(정시 퇴근)’나 잘 지키라고 하는 게 훨씬 낫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