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호 국정원장, 국회 정보위서 밝혀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이 27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김정남 암살 등과 관련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국가정보원이 27일 김정남 암살에 북한 국가보위성 요원이 대거 가담했다고 밝힘에 따라 왜 이 시점에 많은 흔적을 남긴 엉성한 테러를 저질렀는지를 가늠할 단서가 잡혔다. 국정원은 “어느 기관이 암살을 주도했는지 추적 중”이라고 했다. 존폐 위기에 놓인 보위성이 ‘실적’을 내기 위해 조급하게 일을 꾸몄을 가능성과 함께 다른 기관이 보위성과 외무성 요원을 동원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 최대 위기 맞은 보위성
현재 보위성은 김정은 집권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국정원은 이에 대해 “주민 통제를 너무 강하게 하고, 특히 (고위) 간부를 고문해 죽인 사건을 허위 보고해 들통이 났기 때문”이라고 국회 정보위원회에 27일 설명했다. 당 조직지도부가 이런 사실을 보고하자 격노한 김정은은 보위성에 대한 집중 검열을 지시했고 지난해 12월 초부터 검열이 시작됐다.
원래 보위성은 해외 및 대남 공작 기능이 없었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 들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온 김원홍 보위상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정찰총국 등이 갖고 있던 해외 공작 기능까지 일부 가로챘다. 이 때문에 김영철 당 통일전선부장과 감정의 골이 깊어져 헤게모니 싸움까지 벌어졌다. 지난해 7월 김정은은 김영철을 혁명화교육에 보내며 김원홍의 손을 들어줬다. 이 때문에 보위성으로서는 해외 작전을 잘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지도부가 궤멸된 상황에서 김정남 암살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힘이 빠진 보위성 요원 및 외무성 요원을 정찰총국 등 다른 기관이 지휘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 김정남 테러의 재구성
1월 김정남 살해 임무를 받은 두 개 팀이 해외에 파견됐다. 국정원에 따르면 1조는 보위성 소속 리재남(57), 외무성 소속 리지현(33)으로 구성돼 베트남 여성 도안티흐엉(29)을 포섭했고. 2조는 보위성 오정길(55)과 외무성 홍성학(34)으로 구성돼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25)를 포섭했다. 외무성 소속으로 외국어에 능숙하고 젊은 리지현과 홍성학은 외국인 여성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2개 조는 2월 초 살수(殺手)로 포섭한 외국인 여성 2명을 데리고 말레이시아에서 합류했다. 국정원은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 보위성 주재관인 현광성 등 4명으로 구성된 지원조가 암살조의 이동과 김정남 동향 추적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말레이시아 당국에 체포된 리정철(47)도 보위성 소속의 해외 파견 요원으로 보인다. 결국 이번은 보위성 4명, 외무성 2명 외에 고려항공과 내각 직속 신광무역 소속 직원들이 협력해 저질렀다는 게 국정원의 결론이다.
보위성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정남을 급히 살해했다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정교한 살해 계획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상황에서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보다 빨리, 확실하게 죽이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다. 김정남 살해로 보위성은 존재 가치를 입증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김정은의 신임을 회복했을지, 아니면 분노만 더 샀을지는 더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