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은 국민 보건의료·사회보장·사회복지에 관련된 연구를 통해 정책수행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와 결과를 도출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입니다. 우리 사회 가장 큰 화두인 저출산·고령화 관련 연구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정책수행기관도 아니고, 이해단체가 얽힌 것도 아닌 연구소가 요 며칠 전, 갑자기 ‘성차별’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한 연구위원의 발표 내용 때문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22일 올라온 6쪽짜리 보도자료였는데요. 바로 ‘제13차 인구포럼 개최-주요 저출산대책의 성과와 향후 발전 방향’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 입니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혼가정의 출산율을 제고하기보다 미혼자들의 혼인율을 높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네, 좋은 말씀이죠. 그런데 혼인율 제고를 위한 방법이 미혼자가 교육에 투자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랍니다. 교육기간이 길어 결혼이 늦어지니 가방끈이 짧아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어서 교육기간을 효과적으로 줄이려면 휴학과 연수, 자격증 취득에 불이익을 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高)스펙’을 쌓지 않아야 결혼을 빨리 한다면서요. 그 다음 내용은 굉장히 신선하기까지 합니다. IT 역량을 활용해 국가가 정책적으로 ‘사이버 만남’을 주선하고 이를 대학에 보급하는 방안을 고려하라는 내용입니다.
고스펙 여성들이 눈을 낮출 수 있는 문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며, 그걸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수준으로 은밀히 진행’하라는 현실적인 조언도 잊지 않습니다. 이 내용은 보도자료에만 나온 게 아니라 해당 포럼 발표에서도 구두로 참석자들에게 전달됐습니다.
이런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며 ‘온 여성의 공적’이 된 해당 연구위원은 결국 26일 보직을 사임했습니다. 다음날 기자는 어렵게 그 연구위원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연구위원은 “논문 전문을 보면 제 의도는 잘 나와있다”며 “이론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제가 불필요하게 정책적 해석을 추가해 문제가 된 것 같다. 제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해 발생한 일이다”고 해명했습니다.
논문 전문을 봤습니다. 연구위원이 말한대로 출산율과 혼인율의 관계를 복잡한 수식으로 풀어본 지극히 이론적인 논문입니다.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남녀가 비슷한 스펙일 때 혼인효용이 극대화돼 혼인 시 서로 비슷한 스펙을 찾는데, 여성이 고스펙화(化)하다 보니 초고스펙 여성과 저(低)스펙 남성이 짝을 못 찾고 남게 된다.
아무리 봐도 출산율 제고에 있어 여성을 단순히 수식의 변수와 같이 취급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연구위원이 어떤 의미로 ‘인문학적 소양’을 언급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명확해 보입니다. 그의 보고서에서 여성의 인문학(언어·역사·철학)은 철저히 배제돼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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