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배가 운영하는 사무실에서 모여 각자 준비해온 포도주와 빵을 차려놓고 모임을 가졌다. 그 사무실이 편해서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저녁값 술값 부담을 줄여보자는 의도도 있었다. 1년 전 모임 때도 그랬다. 난방을 줄여 놓고 사무실에서 세 사람 다 외투를 껴입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득 그때로 시간이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딱히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유심히 보니 나까지 모두 지난해와 똑같아 보이는 외투를 입고 있었다.
얼마 전에 동생과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가 옷을 파는 상점에 들어갔다. 진열된 봄옷 뒤쪽으로 겨울옷들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외투는 새것이 필요하지도 않은데 디자인과 겉감이 단순하고 실용적으로 보이는 옷이 눈에 띄어 충동구매해버렸다. 중학교 때 교복 자율화가 실행돼서 겨우 1년밖에 교복을 못 입어 보았다. 학창 시절 내내 사복을 입고 다녀야 하는 게 여러 가지로 나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특히 동네를 벗어나 시내 한복판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그런 것에 무심해지려고 해도 입고 다니는 옷만으로 어떤 격차를 확연히 느끼게 될 수밖에 없었다.
코트의 순화어로 알고 있는 ‘외투(外套)’를 국립국어원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건의 검색 결과가 나온다. 첫 번째는 다 아는 대로 ‘추위를 막기 위해 겉옷 위에 입는 의류’라는 뜻으로, 두 번째는 고골의 단편소설 ‘외투’에 관한 내용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고골의 ‘외투’에 관해 쓴 글을 읽을 때마다 그 소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외투’의 줄거리는 간단해 보인다. 소심하고 직급이 낮은 한 관리가 외투가 낡아버려 새로 맞출 수밖에 없는 형편에 놓인다. 생활비를 아끼고 절약한 끝에 장만한 새 외투를 입고 나간 첫날, 강도들을 만나 옷을 빼앗기고 만다. 풍자와 환상성과 유머는 고골 문학의 특징이며 그중에서도 유머(웃음)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내가 여러 번 읽은 ‘외투’가 수록된 책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웃음은 “눈물로 가려진 웃음”이라고 한다. 그 점과 연관시켜 나보코프의 “어떤 것의 우스운(comic) 측면과 우주적(cosmic) 측면의 차이는 치찰음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하게 한다”는 문장도 잊히지 않는다. 인간성 혹은 영혼에 대한 호소를 동반하지 않는 유머라면 아마 문학작품에선 큰 의미가 생겨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곳곳에서 봄소식이 들리지만 외투 없이 당장 3월을 보내기는 어렵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되고 주 후반부터 꽃샘추위가 시작될 거라는 예보도 들린다. 안팎으로 내핍의 날들도 너무 길게 이어지고 있기도 하고. 현실적이든 이상적인 것이든 어딘가에 “불멸의 외투” 같은 것이 있어 서로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