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신탁통치 반대 시위
평양 주둔 소련군사령부 대표단 70여 명이 서울행 기차로 내려오고 있는 시간이었다. 한반도의 독립 문제를 협의할 미소공동위원회의 예비회담을 위해서였다. 서울을 비롯해 38선 이남은 새해 들어 2주 내내 난리였다. 연말에 전해진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결의안에 여론은 찬반 양쪽으로 갈려 대립하고 있었다. 연일 성명이고 시위였다. 테러도 일어났다.
김구는 새해 첫날 라디오 방송을 통해 “평화적 수단으로 신탁통치를 배격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했다. 일사불란 신탁 찬성을 표방한 38선 이북에서는 조만식이 소련군사령부의 신탁 지지 요구를 거절하고 감금되었다. 이승만은 공산분자와의 협상은 무의미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메시지를 소련 대표의 서울 도착 날 발표했다.
다음 날 미국과 소련의 예비회담이 태극기가 새로 휘날리는 군정청에서 개막되었다. 신문에는 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듯 다음과 같은 구절이 실렸다.
‘삼천만이 합심(合心)하면 태극기 한 폭에 마음이 엉키고/삼천만이 각심(各心)되면 태극기 한 폭이 삼천만 갈래라/…/너는 퇴보! 나는 진보!를 가릴 것 없이 태극기 밑 한 목적지로 모이자.’(1월 16일자)
회의 기간 동안 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가두시위가 경복궁 앞 군정청 주위에 집중되었다. 그렇게 반탁과 찬탁의 소용돌이 속에 맞은 광복 후 첫 3·1절은 좌우익이 파고다공원과 남산공원에서 따로 27주년 기념식을 치렀다. 3월 20일 개막한 미소공동위원회 본회담은 두어 달간 표류하다 흐지부지되었다.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고 분열의 앙금은 짙어졌다. 남북은 점점 분리되어 38도선은 국경 아닌 국경선처럼 되어갔고, 그 남쪽은 좌우라는 추상어를 경계선으로 쪼개져 갔다.
미소공위가 공전하던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 북쪽을 다녀온 미국의 방북시찰단은 본국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