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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금빛 봉황이 날아오를 듯… 현존 最古 백제 금동관의 자태

입력 | 2017-03-08 03:00:00

<28> 공주 수촌리 고분 발굴




수촌리 4호 석실분 출토 금동관으로 높이는 19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는 한 마리 ‘금빛 봉황’을 보았다. 6일 국립공주박물관 전시실에서 본 수촌리 고분 출토 금동관은 신라 금관과 또 다른 아취를 담고 있었다. 온몸에 달개를 매단 세 줄기 입식(立飾)은 정면에서 보면 꼿꼿이 세운 봉황 머리와 양옆으로 활짝 편 날개를 연상시켰다. 나뭇가지를 닮은 신라 금관의 입식과 확연히 다른 형태다. 특히 머리에 닿는 관테까지 날렵하게 이어진 곡선은 우아함을 더한다. 수촌리 고분에서 함께 나온 금동신발과 금귀고리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삼국시대 장신구 연구 권위자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수촌리 금귀고리는 현미경으로 200배를 확대해 봐도 만듦새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며 “백제 왕실에 소속된 최고 장인의 솜씨”라고 말했다. 그러나 4∼5세기 한성백제시대 수촌리는 백제 영토였지만 중앙과 멀리 떨어진 지방이었다. 이 1급 유물들이 왜 한성이 아닌 이곳에 묻혀 있을까.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2003∼2013년 수촌리를 발굴한 이훈 당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발굴단장(55·현 공주대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과 현장을 찾았다.

○ 묘제(墓制) 세 번이나 바뀐 사연

충남 공주시 수촌리 야트막한 구릉에 오르자 정상에 봉분 6기가 원형을 이루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래로도 고분 10여 기가 늘어서 있는데 절벽 끄트머리에 제단(祭壇)을 이루는 돌무더기가 깔려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이 중 나란히 조성된 무덤 세 쌍은 부부 관계임이 확인됐다.
 

수촌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구슬과 대롱옥. 구슬 지름은 0.2-1.05cm 정도 된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한쪽 무덤에서 남성 수장이 죽을 때 몸에 씌우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이 나온 반면 다른 쪽에서는 여성 시신에 걸치는 구슬 장식, 굵은고리 금귀고리 등이 나온 것. 이훈은 “수촌리는 4세기 말∼5세기 중엽까지 약 60년에 걸쳐 4세대가 묻힌 지방 지배층의 가족묘”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건 무덤들이 조성된 양식이 빠르게 변한 흔적이다. 시대순에 따라 덧널무덤(토광목곽묘)과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 앞트기식 돌덧널무덤(횡구식 석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이 모두 발견됐다. 유물로 보면 분명 같은 집단인데 불과 60년 동안 묘제가 세 번이나 바뀐 셈이다.

중국 동진에서 만들어진 흑유닭모양항아리. 당시로선 최고급품에 속한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이훈은 “수촌리 지배집단이 백제 중앙과 교류하면서 돌무덤을 들여온 것”이라며 “최고 수준의 금동관, 금동신발, 중국 자기들이 부장된 걸 보면 이들이 백제 왕실과 돈독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백제가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배경일 수도 있다. 학계는 4∼5세기 백제 왕실이 지방 유력자들을 통해 간접지배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에게 금동관 등을 사여한 걸로 보고 있다.
 

이훈 공주대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이 6일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수촌리 고분 금동관을 살펴보고 있다. 뒤쪽 금동관이 이 연구위원이 4호분에서 발굴한 것으로, 앞쪽은 원형을 복원한 복제품이다. 공주=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1600년간 제자리 지킨 목관 꺾쇠·관못

수촌리 1호분 토광묘에서 출토된 금동관으로 높이는 약 18.7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2003년 11월 3일 발굴팀은 광복 이후 처음으로 백제 금동관을 발견했다. 지금껏 발견된 백제 금동관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덧널무덤인 1호분 내부를 十자형으로 팠는데 바닥에서 금동관과 환두대도가 함께 나왔다. 이훈은 직접 만든 대나무칼로 푸르스름한 청동녹이 낀 금동관을 조금씩 땅 위에 노출시켰다.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자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도움을 요청했다. 바깥 공기에 취약한 청동유물 특성상 보존과학 전문가들이 흙과 함께 통째로 수습하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길이 35cm의 재갈.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말을 탈 때 쓰는 등자로 길이 25.0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쇠창으로 길이는 29.2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유물도 화려했지만 사실 학문적으로 더 중요했던 건 조성 당시 위치를 간직한 목관 꺾쇠와 관못이었다. 발굴팀은 3열에 걸쳐 목관을 두른 총 90여 개의 꺾쇠를 지표 20cm 아래서 찾아냈다. 통상 오랜 세월이 흘러 목관이 썩으면 물이 흘러들어가 꺾쇠나 관못의 위치가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운 좋게도 1호분은 물 대신 모래흙이 목관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가 부속품이 고정될 수 있었다. 덕분에 발굴팀은 백제 지방 지배층이 사용한 목관의 형태와 크기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 내세에도 다시 만나리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첫번째 사진), 금동관(두번쨰 사진)과 대롱옥. 부부가 묻힌 4호분과 5호분에 각각 부장된 대롱옥을 맞춰보니 아귀가 딱 맞았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야, 이게 정말로 딱 붙습니다!”

2004년 7월 발굴팀에서 사진을 담당한 이형주 연구원이 흥분한 목소리로 갑자기 외쳤다. 수촌리 고분 출토 유물들을 늘어놓고 촬영하던 이형주가 4호분과 5호분에서 각각 나온 대롱옥(관옥) 2점을 우연히 맞춰봤는데 거짓말처럼 아귀가 맞았다. 원래 하나였던 대롱옥을 두 개로 부러뜨린 뒤 남편과 아내 무덤에 각각 부장한 것이었다. 생전에 금실 좋던 부부가 내세에 가서도 다시 만나자는 의미로 쪼갠 게 아닐까.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떠올리는 역사의 내러티브는 때론 소설보다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27>경주 사천왕사터 발굴
 
<26>부여 왕흥사 목탑 터 발굴
 
<25>공주 석장리 유적 발굴한 박희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공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