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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의 마음의 지도]금단증상에 빠지지 말고 머뭇거리지 말고

입력 | 2017-03-10 03:00:00

퇴직의 심리학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당황스럽고 불안합니다. 문이 안 열립니다. 퇴직하기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남았는데. 격리불안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퇴출당한 느낌이 확 옵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잠금장치의 등록사항을 너무 일찍 삭제했다고 합니다. 수습이 되었습니다만, 기분은 좋을 리가 없습니다.

다행히 글쓰기의 소재가 생겼습니다. 퇴직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퇴직은 상실입니다. 일을 잃는 겁니다. 일이란 무엇인가요. 도전, 만족, 대인관계 통로, 협동입니다. 월급입니다. 자아정체성의 한 축입니다. 일이 있으면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고, 없으면 방치된 사람입니다. 일은 내 삶의 틀입니다. 일이 없으면 리듬이 깨어져서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쉽게 걸립니다.

일을 떠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변 정리는 물론이고,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불안, 두려움, 현직 동료들에 대한 약간의 시기심이 마음속을 들락날락합니다. 감정의 ‘비빔밥’이 몰려오니 마음의 균형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균형이 무너지면 ‘거세’된 느낌까지 올라옵니다. 구조조정으로 나가야 하는 입장이라면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퇴직의 과정이란 결국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도의 과정입니다.

퇴직의 심리적 고통을 외면하려고 ‘눈 가리고 아웅’해 보았자 부작용만 겪습니다. 두려움과 희망, 기대와 현실을 거쳐 가며 하나씩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퇴직도 엄연히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는 발달과정의 당당한 구성요소입니다. 일찍 인정하면 대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퇴직 후의 삶은 선택사항입니다. 생산적인 삶의 지속인가, 자포자기에 빠진 은둔자인가. 제대로 된 선택에는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 필수과목입니다. 퇴직은 곧 ‘늘 휴가 중’이란 뜻이고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이 있다면, 두려움을 먼저 극복해야 합니다. 이해는 가지만, 아직 가지 않은 길을 서둘러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퇴직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익숙함을 버리고 낯선 삶을 시작하는 일은 스트레스입니다. 넓은 세상에 연착륙하려면 학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서류 복사는 물론이고 은행, 우체국, 대중교통 이용이 모두 대상입니다. 당연히 내가 모두, 기꺼이 해야 합니다. 평소에 높은 자리에 계셨다면 적응에 더 신경 써야 합니다. 금단증상이 아주 심합니다. 퇴직 후에도 지키는 카리스마는 독약입니다.

매일 아침, “지난 세월 대단한 일을 해왔었지, 앞으로도 파이팅!”을 외칩시다. 가족이 눈치를 주면 마음으로만 합니다. 10번씩. 이상하게 보여도 상관없습니다. 자존감 살리기에 도움이 됩니다. 몸 건강도 잘 관리합시다. 너무 바빠서 챙기지 못했으니, 돈과 시간이 들어도 건강검진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습니다.

지난 삶에 대한 생각은 원래 들쑥날쑥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히 의미 있는 삶을 살았고, 다르게 생각하면 헛되게 살아온 것같이 느낍니다. 이럴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의미’라고 하는 것은 원래 주관적이고 변덕스러운 물건입니다. 정신을 놓으면 멀리 달아나 버립니다. 삶에 대한 평가는 결국 ‘코끼리 더듬기’입니다. 코를 만지면 코, 몸통을 만지면 몸통, 꼬리를 만지면 꼬리가 만져집니다. 남이 아닌, 내가 내 삶을 평가해야 성숙한 겁니다. 직장에서 내가 한 일이 지속될 것인가. 신경을 끊으십시오. 인간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나는 게 좋습니다. 안 그러면 우울해집니다. 인류 역사에서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일을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재직하는 동안 최선을 다했다면 스스로를 칭찬해도 됩니다. 정년을 마칠 때까지 꾸준히 근무했다면 개근상에 해당됩니다. 우등상에 연연하는 것은 초등학교 때나 하는 겁니다.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퇴직하는 나이가 되면 삶이 그리 근사하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작고 큰 흠집이 삶에 이미 생겼습니다. 몸이 성하지가 않습니다. 배우자는 아프거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자식들은 결혼을 해서 떠났거나, 옛날의 어린 자식들이 아닙니다. 직장 후배들에게도 말이 먹히지가 않습니다. 잔소리로 건성건성 듣습니다. 총체적인 위기 상황입니다.

퇴직자에게 중요한 덕목은 말랑말랑한 마음입니다. 융통성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듬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굳어진 마음을 풀고 펴야 합니다. 그래야 대인관계의 충돌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작은 일을 만들어 계속하거나 취미에 몰입해야 자존감을 지키고 자아상실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면 모든 일이 어려워집니다. 융통성 확보는 밖을 향한 노력이고, 자아상실 예방은 안을 향한 노력입니다.

퇴직의 실체는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몸도 마음도 지키기가 어려워집니다. 사소한 병에도 잘 걸리고, 작은 스트레스에도 넘어집니다.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 섭섭해합니다. 그러다가 세상을 등지는 삶으로 빠집니다. 홀로 하는 등산도, 건강을 위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세상과 나를 격리시키는 목적으로 쓰입니다. 갑자기 시간이 많이 생기면 너무 바빠서 신경 못 쓰던 다른 사람들이 눈에 보입니다. 가족은 더 잘 보입니다. 갑자기 관심과 배려라는 이름으로 간섭을 시작하기 쉽습니다만 자식들도, 후배들도 이미 훌쩍 컸음을 알아채야 합니다. 침묵이 대개는 정답입니다. 월급봉투의 힘이나 ‘한턱 쏘는 힘’도 소멸되었으니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퇴직자의 꿈은 ‘유턴’입니다.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유턴 신호는 안 나옵니다. 인생의 판이 바뀌었음을 인정하고 종착점을 향해 직진합시다. 머뭇거리다가 추돌을 당하느니 일단 떠납시다. 새로운 풍경을 접하는 기쁨도 있을 겁니다.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의 새로운 기회를 찾읍시다. 억지로라도! 단, 새로운 기회는 매일 집중해서 오랜 기간 고민해야 찾아옵니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을 것도 있습니다.

제가 이제 현직을 떠나 작은 배를 타고 세상에 나왔음을 보고합니다. 성원을 부탁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