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동 백송의 1930년대 모습(동아일보 1933년 7월 23일자)과 현재모습(헌법재판소 경내).
홍영식은 근대적 우편행정 부처로 신설된 우정국의 수장으로 그 개국 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모자의 일원이다. 친일 개화파가 친중 사대당을 제거하고 세운 신정부는 중국 주둔군의 진압으로 3일 만에 무너졌다. 거사 지도부가 일본으로 도주하는 동안 홍영식은 국왕과 함께 창덕궁 뒷산으로 피신했다가 피살되었다. 가지 말라 옷깃을 붙잡는 홍영식의 손길을 뿌리치고 임금은 대궐 앞 중국군의 진중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중국의 주둔병이 상감을 보호하였습니다. 죽은 죄인 홍영식에게 속히 노륙(노戮)의 법을 행하소서.’(승정원일기 1884년 10월 23일자)
‘방바닥은 유혈이 낭자하여 홍영식의 가족들이 이곳에서 살해되었음을 입증한다. 집은 철저히 약탈된 상태였다. 문짝과 창문, 화로와 서책, 벽에 걸린 물건들까지 노략질해갔다.’(알렌의 일기 1885년 3월 1일자)
그보다 몇 배 더 큰 유혈극이 그로부터 400여 년 전 이 동네 재동에서 또 있었다. 1453년의 계유정난. 13세의 현역 국왕을 폐위시키고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수양대군과 그 수하가 벌인 대학살극이었다. 단종을 보필하던 중신들을 참살하여 그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피비린내가 등천했다고 전한다. 마을 사람들이 집집마다 재를 긁어 나와 유혈낭자한 길바닥을 덮었다는 뜻에서 잿골, 즉 재동이 되었다는 말이 동네 이름의 유래로 전해온다.
‘흰 몸을 버티고 선 이 백송의 고향은 중국입니다. 세상은 바뀌어서 정승판서가 거닐던 그 소나무 밑에는 지금 검은 옷 입은 여학생들이 찾아들어 책을 읽는답니다.’(동아일보 1924년 7월 1일자) 잿빛과 핏빛 날들을 목격한 생존자로서 재동 백송은 정권도 정변도 소멸한 망국의 시절을 거쳐 오늘을 굽어본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