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과정에선 몽니를 부렸다. 이홍장이 ‘조선은 청의 속방(屬邦)’이라는 내용을 제1조에 명문화하려 들었다. 하지만 미국의 전권특사인 로버트 슈펠트 제독이 조선은 독립국이라며 강력히 반대하며 버텨 결국 빠졌다. 슈펠트는 그해 5월 조인식 때 조선이 청의 용기(龍旗)나 이를 일부 바꾼 기를 들고 나오면 속국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국기 제정도 촉구했다. 태극기를 정식 제정하기 전이라 조선은 ‘태극도형기’를 임시로 만들어 사용했다.
▷중국의 근대 계몽사상가인 량치차오는 청일전쟁의 패배와 관련해 이홍장의 열두 가지 책임을 따졌다. 그 첫 번째는 “조선이 여러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도록 잘못 권했다”라는 것이다. 당대의 선각자였던 량치차오는 서구 문명 수용을 주장해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중국의 속국이었던 조선이 외교권을 행사케 된 것은 영 못마땅해했다. 그는 조선의 망국에 “흐느껴 울며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애통해했으나 조선의 무능을 조롱하는 글도 남겼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