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진 부국장
잔혹한 폭력 묘사와 끔찍한 강간 장면 탓에 관객 세 명이 실신해 실려가고 주연 여배우인 모니카 벨루치마저 시사회 도중 나가버렸다는 일화와 함께 그해 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화제작이다.
시간을 역순으로 구성한 이 영화는 분노로 가득한 남자가 누군가를 무자비하게 죽이는 가장 최근의 사건에서 시작해 다음 장면에서는 사건 발생 전의 상황을 보여주는 식으로 조금씩 시간을 되돌린다. 참혹한 결말을 관객들은 이미 알기에 사건을 불러올 단초를 보면서 안타까움이 커진다. “아, 저 때 막을 수 있었는데….”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불거졌을 때 국민들이 바랐던 건 대통령이 솔직하게 사실을 밝히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다른 결말을 만들었을지 모를 순간들도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직접 나가 잘못을 인정하고 ‘선의’를 주장했다면 8 대 0이라는 판결이 나왔을까. 실제로 재판관들은 법률과 헌법 위반이 과연 파면할 만큼 중대한지를 놓고는 이견을 보였다. 결국 만장일치를 이끌어낸 데엔 진정성 없는 해명과 수사 회피 등 태도가 컸다.
지난해 대국민담화도 되돌리고 싶을 것 같다. 불과 한 달여 사이에 세 차례나 고개를 숙였지만 남은 건 “내가 이러려고…자괴감”이라는 유행어와 4%라는 지지율뿐이었다.
시간을 좀 더 되돌려본다. ‘최순실 국정 농단’의 예고편과 같았던 결정적 순간이다. 2014년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 유출 파문. 당시 청와대는 비선실세 의혹을 ‘찌라시’ 수준으로 치부하고 그보다 문건 유출 자체만 국기문란으로 문제 삼았다. 그때라도 철저히 주변을 정리했더라면.
오토바이까지 동원한 방송의 생중계를 지켜보면서 청와대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나는’ 드라마틱한 삶이 인간적으로는 안됐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 생각은 박 전 대통령을 태운 차가 삼성동 사저 골목에 들어설 때까지 딱 21분 동안만 이어졌다. 차 안에서부터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드는 모습은 당혹스러웠다.
기대했던 건 한마디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갈라진 국민들의 마음을 모아 지금의 혼란을 극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 이 말은 박 전 대통령이 대리인의 입을 빌려 했던 헌재 최후 변론의 마지막 대목이다. 하지만 그날 저녁, 전(前) 대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내놓은 메시지에는 화합도, 승복도 없었다. 설령 억울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더라도 한때 51%의 지지를 받았던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 줄 수는 없었을까.
어쩌면 먼 훗날엔 삼성동 사저 골목에 섰던 그때가 가장 돌이키고 싶은 뼈아픈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강수진 부국장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