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영 스포츠부 기자
폐회식 취재를 끝내고는 일본 삿포로 컨벤션센터에 마련된 메인프레스센터(MPC)를 찾았다. 휴게실에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본 종합 일간지와 스포츠지를 뒤적이다 1990년대에 한국을 무척 괴롭혔던 일본 축구 스타 미우라 가즈요시(50·요코하마 FC)를 조명한 기사를 보았다.
이날은 미우라의 50번째 생일이었다. 신문들은 이날 개막한 일본프로축구(J리그)에서 미우라가 현역 최고령 선수로 계속 뛰고 있다는 내용을 전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읽어 내려간 기사 내용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과거의 자랑거리를 잊고 지낸 것이 지금도 20대 선수들과 함께 뛸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는 미우라의 말이었다.
미우라는 12일 J2리그 경기에서 골을 넣어 50세 14일로 일본 최고령 득점 기록을 세웠다. 이 내용을 접하고 ‘분명 미우라는 이번 골에 대한 기쁨을 곧바로 털어내고 다음 골을 생각하며 훈련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스포츠에서도 요즘 ‘과거의 영광을 잊어야 산다’는 말이 나온다. 13일 개막한 아시아여자핸드볼선수권에 나선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강재원 감독(부산시설공단)은 요즘 습관처럼 “‘우생순’을 잊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생순’은 2004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선전을 그린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강 감독은 심지어 “우생순 시대는 갔다”란 말도 서슴지 않고 한다. 핸드볼 앞에 붙는 ‘효자 종목’이라는 수식어도 언론 보도에서 내심 빼줬으면 한다. 고참 선수들이든 어린 선수들이든 ‘우생순 지우개’가 필요하다고 한다.
한국 여자 핸드볼은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의 영광과 환희를 너무 진하게 기억해왔다. 비인기 종목 핸드볼을 둘러싼 열악한 환경도 문제였지만 과거의 영광에 대한 너무 진한 기억도 대표팀의 전력 발전과 세대교체를 막았다. 한국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예선 탈락했다.
최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맛본 한국 야구 대표팀을 두고 일부 야구인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과 2009년 WBC 준우승의 영광이 맹독으로 작용했다”고 일침을 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재영 스포츠부 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