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Magazine D/특별기획]“초음파 진단기 사용 안돼” 허준이 살아있다면…

입력 | 2017-03-14 09:29:00

‘한의학 과학화’ 어디로 가나 - 2부 / 기로에 선 한의학 과학화






---------------------------------------
1부 ‘비방(秘方)’이 키운 불신
2부 기로에 선 한의학 과학화
3부 ‘의한(醫韓)협진’ 그 희망의 길을 찾아서
---------------------------------------

법원에서 한의사의 시술을 금지한 ‘카복시’ 시술 장면.



지난해 12월 16일 서울중앙지법에선 두 건의 판결이 동시에 나왔다. 초음파 진단기 사용과 카복시 시술이 의료법상 한의사에게 허용된 면허범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사실상 한의사들의 사용을 금지한 것이다.

해당 의료기기를 사용하던 한의사들은 즉각 반발했다. 특히 카복시 시술과 한방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병행하던 한의사들의 반발이 컸다. 환자수가 급감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한의원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던 시술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체인망을 갖춘 한 유명 한의원 원장의 하소연이다.

“타격이 있죠. 카복시 시술이 다이어트나 라인 관리 및 개선 프로그램에서 일종의 고유명사인데, 한의원에서는 안 한다거나 못 한다면 결국 ‘한의원에서는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안 하는구나’ 이렇게 인식할 수 있는 거죠, 일반인이 보기에는.”



초음파 진단기와 카복시 외에도 그동안 한의사들이 사용할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을 받은 현대 의료기기는 더 있다. CT(컴퓨터 단층촬영), 진단용 방사선 발생장치, X선 골밀도 측정기, 초음파 골밀도 측정기, IPL(복합광파장), 필러 등이다.

2013년 12월 헌법재판소가 한의사들이 안압측정기 등 5종의 현대 의료기기를 사용하도록 허용한 적이 있지만, 잇따른 패소판결에 한의사들은 무척 당혹스러운 처지다. 한의학계는 “정확한 진단을 위해 현대 의료기기 사용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지호 대한한의사협회 홍보이사의 설명이다.

“발달된 과학기술을 통해서 X-ray 사진만 한번 찍어보면 골절 여부를 알 수 있는 상황에서 그 기계를 안 써서 환자의 상태를 부정확하게 진단할 필요는 없죠. 만약 허준 선생이 살아있을 때 X-ray가 들어왔다면, 과연 당시 한의사들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답은 뻔하다. 의료인이라면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보다나은 장비를 가지고 환자를 정확히 관찰하려고 할 것이다. 그건 의료인의 기본적인 생각이지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나눌 것은 아니다.”

김 이사는 또 “의대와 한의대 6년 교육과정을 비교하면 교육 내용에 큰 차이가 없는데도 한의사들만 현대 의료기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의료기기 교육 없이는 오진·의료사고 우려

지난해 3월, 김필건 대한한의사협회장은 한의사들에게 사용이 금지된 초음파 골밀도 진단기를 직접 시연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하지만 오히려 논란만 가중시켰다.



하지만 의사들의 생각은 다르다. 권철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장은 “한의사가 의사와 같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는다면 오진이나 의료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반박한다. 권 위원장의 부연 설명.

“(의사들은) 많은 학회에 참여하고 많은 공부를 하고 전문 분야를 넓혀가기 위해 많은 강의를 받는다. 그런데도 임상에 적응하기 굉장히 어렵고 무리가 따른다. 의학적인 지식이나 기초가 탄탄한 의사들조차도 자기의 영역 밖은 쉽사리 접근하지 않고 소극적이 된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진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혹시나 오진을 내릴까봐 그러는 것이다.”

한의학계에선 의학계의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지난해 초 김필건 대한한의사협회장이 직접 시연에 나서기도 했다. 초음파 골밀도 측정기로 환자의 상태를 진단하는 모습을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한 것. 그런데 이날 시연은 오히려 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한의사협회 측에선 “골밀도 검사 측정부위가 잘못됐고, 측정 결과에 대한 해석도 맞지 않다”고 지적한 반면, 대한한의사협회 측에서는 “양방의료계의 왜곡을 통한 흠집 내기”라고 반박했다. 결국 의학계와 한의학계, 직역 간 갈등의 골만 더욱 깊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방 의료기기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개발한 맥진기를 직접 체험해보는 기자. 아직은 초기 단계다.



사실 현대 의료기기 문제는 과학화를 표방한 한의학계의 가장 큰 화두이자 고민거리다. 정부 산하의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는 한의사들의 보다 정확한 진단을 돕기 위해 새로운 한방 의료기기 개발에도 노력한다.

맥진의 요소인 맥압, 맥의 폭과 길이, 맥의 깊이 등의 정보를 측정해 환자의 상태를 진단하는 맥진기, 혀의 상태와 색상 등을 파악해 진단하는 설진기, 얼굴과 목소리 등으로 사상체질을 진단하는 진단툴 등이 현재까지 개발된 대표적인 한방 의료기기다.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개발한 통합체질 건강진단·자극 시스템과 설진기.



아직은 초보적 수준이지만, 다행스러운 건 한방 의료기기 시장의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것. 포항공대를 거쳐 스웨덴대학에서 나노 물리학을 전공한 김재욱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기반연구부장의 진단이다.

“MRI나 초음파 기기 등의 원천기술은 지멘스, 필립스, GE 등 큰 회사들이 이미 다 장악한 상태다. 뒤늦게 따라가기 힘들다. 삼성도 의료기기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아직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우리가 독창성을 가진 분야는 사실 한방이다. 그런 면에서 굉장히 매력 있는 연구 분야다.”

의학계 도움 없이는 한방 과학화 어려워

물론 아직 한계는 있다. 의학계의 도움 없이는 연구개발을 위한 기본적인 데이터조차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김 부장은 “의료는 데이터 싸움”이라고 말한다.
“한방에서 볼 수 있는 질환이 많지 않다.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여러 곳에서 서로 다른 병증을 가진 질환군에 대해 동시에 측정하는 게 필요하다. 이차적으로는 한방과 양방이 함께 데이터를 축적해야 비로소 데이터로서 가치가 있다. 그래야 좋은 논문이 나올 수 있고, 그걸 근거로 새로운 의료기술을 연구할 수 있다.”

중요한 기로에 선 한의학 과학화. 윤강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한의학이 과학화되기 위해서는 결국 현대 과학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면서 의학계와 한의학계, 양쪽 모두에 협력을 제안했다.

“의사들이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것부터 한방의료 행위나 한약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한의사들이 참여한 상황에서다. 단순히 ‘내 영역이다’ ‘내 면허 범위다’ 이런 싸움에서 벗어나 연구라든가, 의학계에서 지적해왔던 한방 의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간에) 접점을 찾았으면 한다.”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