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글을 인터넷 연결이 안 되는, 한글만 쓸 수 있는 구식 노트북으로 쓰고 있다. 소설이나 모든 원고 작업도 이 노트북으로만 한다. 사실 이 노트북은 고장 난 지 오래됐지만 글을 쓰는 데는 문제가 없다. 말하자면 타이핑 기능밖에 안 되는 ‘글 쓰는 사물’인 셈이다. 딱히 이 때문은 아니지만 기계에 관한 한 나는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다. 이런 사람, 혹은 멸종 위기의 종(種)을 뜻하는 ‘호모 스크립토루스(homo scriptorus)’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은 폴 오스터의 ‘타자기를 치켜세움’이라는 책에서다.
기계치인 작가가 애착을 갖고 있는 올림피아 수동 타자기와 보낸 9400일간의 기록을 담은 책. 글자판의 키를 눌러 종이에 글자를 찍는 단순한 기계에 불과했을지 모를 사물을 “개성과 품격을 지닌 존재”로 보여준다. 그러나 타자기의 종말은 머지않았고, 작가는 문구점을 찾아가 한꺼번에 많은 양의 리본을 주문한다. 리본의 공급이 중단되면 타자기로 글 쓰는 일은 불가능할 테니까.
벼르고 벼르다가 몇 년 전에 나도 중고 타자기를 한 대 샀다. 사벌식 클로버 747TF. 작업실 책상에 올려놓고 타닥타닥 일기를 썼다. 조카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때인데 애들도 신기한지 그 짧은 손가락으로 자음과 모음을 치면서 놀았다. 떠오르는 대로 문장을 빨리 적기는 어렵지만 전원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손가락만 대면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는 타자기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은 몹시 든든하고 보기에도 좋았다. 얼마 안 가 리본이 몽땅 떨어져버리기는 했지만.
이 소설의 긴 제목은 윌리엄 포크너가 한 말이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 써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그가 “영원한 진실”에 대해 써야 한다고 했던. 바로, 사랑과 명예와 동정과 자존심과 이해와 희생에 대해서. 타자기를 보면 어디서든 치고 싶어진다. “손가락에 짜르르 느껴지는 교류의 맥동.” 연필이나 노트북, 타자기는 누르는 힘을 필요로 한다. 거기에는 의지 또한 필요할지도 모른다.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을 만들고 새기겠다는. 어떤 진실들, 잊어버린 소중한 것에 관해서.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