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용 논설위원
기관장 K, 왜 민간에 갔나
‘쇼핑백 파일’ 중 하나에는 정권 초기 핵심 권력기관을 책임질 후보 명단이 있었다. 흠결이 있다는 ‘×’ 표시가 줄줄이 붙은 대부분의 후보와 달리 단 한 사람, K에 대한 평가만은 깨끗했고 결국 그가 기관장이 됐다. 최순실이 반대했다면 K는 경쟁자에게 밀렸을 것이다. 최순실이 인사에 개입한 범위는 미얀마 대사,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사장, KEB하나은행 본부장 정도가 아니었다.
전직 관료들은 사회 정화장치에 걸리지 않는 반(反)개혁 세력화하는 조짐을 보인다. 쇼핑백 파일 속 전직 기관장 K는 최근 10대 재벌 중 한 곳의 감사로 자리를 옮겼다. K는 앞으로 2억 원이 넘는 연봉을 받으면서 관료 후배들에게 은근하면서도 강하게 각종 민원을 들이밀 것이다. 전직 관료들은 이렇게 쉬운 돈벌이를 하거나, 현직들에게 자신들은 시도해 보지도 못한 비현실적인 조언을 하다가 다음 정권에서 화려하게 복귀하는 시나리오를 꿈꾸고 있다.
그러니 관료사회에서 K를 ‘꺼진 불’이라고 무시할 후배는 없다. 현직들이 전직들의 도덕적 해이나 불법 행위에 눈감는 것은 그게 관료의 미래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처 과장과 주무 서기관들이 현재 자신들의 상사인 장차관의 지시를 경계하는 이상기류가 나타나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경제 부처 차관 등을 보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메모와 녹음을 해두자는 풍조가 퍼지고 있다.
전직들의 로비에는 재빠르게 대응하고 현직의 지시에는 잘 움직이지 않는 관료체제로는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인사와 친(親)문재인 인사들이 관료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소리다. 현직들은 이미 일손을 놓고 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는 재계의 선언은 정치권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당장 국정감사 때 기업인을 무더기로 증인으로 채택했다가 리스트에서 빼주는 대가로 챙겨온 유·무형의 수입부터 줄어들 것이다.
기업이 관청을 상대해온 조직을 없앤다고 해도 대관 업무는 로펌 등 민간에 위탁할 가능성이 높다. 대외활동 비용이 안에서 밖으로 옮겨질 뿐 기업의 부담은 줄지 않는다. 관료의 몸값만 더 뛰게 생겼다. 관료들은 지금 표정관리 중이다.
정경유착의 연결고리가 관료라는 걸 알지만 어떤 정권도 딱 부러지게 개혁을 하지 못했다. 그건 관료들만 공유하는 ‘비밀장부’ 때문이다. 이 장부에는 복지부동, 자리보전, 내 식구 챙기기의 오래된 공식이 담겨 있다. ‘최순실 관료’는 장부를 더 비밀스럽게 만들 것이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