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가끔 표정이 굳어지는 손님이 있다. 방금 만든 음식이 상했을 리는 없다. 사장은 손님의 표정이 가지는 의미를 상상할 뿐이었다. ‘예상했던 맛이 아닌 걸까?’ ‘음식이 싱겁다는 어느 아주머니의 의견을 반영해 소금을 더 넣었는데 그게 화근이었나.’ 이미 내드린 수프의 소금을 뺄 수도 없는데 큰일이었다. 안 그래도 겨우 버티는 가게가 기둥부터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손님 한 분을 잃게 생겼다. 이렇게 손님을 잃어 간다면 가게는 결국 넘어질 것이다. 손님이 나가신다. “잘 먹었습니다. 간이 심심한 게 딱 제 입맛이네요.” 행복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장마철 곰팡이처럼 피어나던 걱정이 한 번에 사라졌다.
일희일비.
초보는 어쩔 수 없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 봐야 안다. 안 먹어 보고 알면 초보가 아니다. ‘적당한 간’을 공식적으로 지정해도 좋겠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나부터도 아침과 저녁의 입맛이 다르니 할 말 없다. 세상에 ‘적당함’처럼 의미 없는 단어도 없어 보인다. 내 입장에서 보면 간의 ‘적당함’을 형성하는 손님들의 기호는 경험을 통해 쌓을 수밖에 없다. 경험이 많아야 적당한 수준을 알 수 있다.
비단 음식의 맛뿐일까. 평균수명의 겨우 3분의 1을 지난 인생 초보들은 고려해야 할 ‘적당함’이 참 많다. 적당한 군 입대 시기, 적당한 결혼 시기, 적당한 인간관계, 적당한 자녀의 수, 적당한 부동산 관리법, 적당한 차량구매법 등. 적당한 정도를 알려면 경험이 많아야 하는데 인생 초보에게 경험이 있을 리가. 난감하다.
옛날 같았으면 다 키운 자식이 있을 나이란 얘기를 종종 듣는다. 속을 다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솝 이야기 한 편이 생각나 찾아보았다. 어느 아버지와 아들이 시장에 나귀를 팔러 가는 이야기다.
나귀를 끌고 가던 아버지에게 행인이 왜 타고 가지 않느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냉큼 올라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친 다른 행인이 아버지를 타박한다. 옆에서 걷는 아들이 불쌍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아버지는 고민 끝에 아들을 태우고 본인은 걷는다. 장에 도착할 때까지 만나는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계속 자리를 바꾸던 둘은 결국 당나귀를 들쳐 메고 시장에 도착한다. 시장은 웃음바다가 된다.
초보는 일희일비한다. 경험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적당함’을 초보는 알 수 없다. 그것을 알아야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사업가에게는 대중의 마음이 필요하다.
당나귀를 결국 짊어지고 갔다던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적당함을 찾기란 힘든 일이었나 보다. 사람들은 늘 일희일비하며 살고 있었다. 약간 무심한 척 시크하게 살아도 괜찮겠다. 일희일비해서 좋아질 게 없어 보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음식이 싱겁다던 아줌마는 안 온다.
최지훈 호호스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