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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조숭호]‘아니면 말고’는 이제 그만

입력 | 2017-03-17 03:00:00


조숭호 정치부 기자

“김정은이 난수방송으로 영국인 암살 지령을 내렸다.”

12일(현지 시간) 영국 선데이 익스프레스는 정보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5일자 북한 난수방송이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 탈북을 도왔던 영국 금융계 인사에 대한 암살 지령”이라고 주장했다. 지령에는 탈북에 관여한 다른 미국인의 암살도 포함됐으며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을 상대로 한 암살 지령은 처음”이라고 이 매체는 덧붙였다.

5일 난수방송에 “924페이지 49번, 14페이지 76번” 등 새로운 내용이 포함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보도는 ‘아니면 말고’ 식의 북한 소식이 어떻게 확산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한국 소식통은 “난수방송은 대조군(난수를 맞춰볼 대상)이 없어 아직 최종 분석은 못한 상태”라고 밝혔다. 한국도 밝히지 못한 정보를 영국 정부가 분석했을 수가 없는데도 ‘단독’ 제목을 단 기사는 트위터에 실려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선데이 익스프레스는 지난해 “태 전 공사 가족은 탈북 도중 대형마트(마크스 앤드 스펜서)에 들러 생필품을 쇼핑했다”고 했던 그 매체다. 생사를 넘나드는 탈북 와중에 접시를 사러 마트에 갔다고? 다행히 본보는 이때 기사를 다루지 않았지만 일부 국내 매체는 인용 보도했다. 미확인비행물체(UFO)를 주요 뉴스로 다루는 황색지의 보도라도 일단 자극적이면 읽힌다는 심산일 것이다. 본보도 그동안 이런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때가 자주 있었음을 고백한다.

정부 정책도 ‘일단 해보자, 아니면 말고’의 연장선에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약 1년 전인 2016년 3월 8일 한국 정부는 △금융제재 △해운제재 △수출입 통제 강화 △북한 해외식당 이용 금지를 핵심으로 하는 독자 대북제재를 발표했다. 북한 4차 핵실험(2016년 1월 6일)에 대한 응징이었다. 같은 달 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역대 최강’ 대북제재 결의 2270호를 채택했다. 한 달 앞선 2월 10일에는 개성공단 가동 전면 중단, 2월 7일에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도입 논의 공식화가 발표됐다.

우리는 1년 전에 비해 얼마나 나아진 세상에 살고 있나. 북한은 추가 핵실험을 했고 핵능력은 더 높아졌으며 신형 미사일 발사로 위협하고 있다. 이대로 북한을 압박·고립하면 상황은 개선될까.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부터 본보는 우리 정부가 대북 정책에 유연성을 발휘해 스스로 퇴로를 차단하지 말라고 주문해왔다. 그럼에도 정부의 대북 강경책은 김정남 피살 사건 이후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지금까지 4년 넘게 지속된 정책의 관성을 한꺼번에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곧 출범할 차기 정부에서 현 정부의 정책을 조금이라도 이어받게 하려면 유연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된 ‘전임 정부 정책 뒤집기’가 이번에는 ‘ABP(Anything But Park·박근혜 정책은 모두 반대)’로 나타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조숭호 정치부 기자 sh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