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도 별로 잘못한 것 없어 -문재인보다 안희정이 더 나쁜 이유 -이정미 재판관 헤어롤의 ‘비밀’ -강경파와 온건파 의견충돌 양상도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집회 중인 사람들. 일부 참가자가 포스트잇 내용을 촬영하고 있다.
“미국이 빨리 北 때려 판을 엎어야 해!”
오후 햇살이 포근하다. 바람 한 점 없는 따사로운 봄날이건만, 이곳엔 싸늘한 냉기와 긴장감이 감돈다. 서울 삼성동에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 앞.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집회 참가자들과 경찰관, 기자, 지나가는 시민들로 어수선하다.
경찰은 왕복 2차선 도로 양쪽으로 폴리스 라인을 쳤다. 태극기를 든 집회 참가자들은 사저를 둘러싼 담벼락 쪽 골목길을 차지하고는 삼삼오오 수군거린다. 간혹 성난 목소리가 골목을 울린다. 폴리스 라인에 막힌 취재진은 길 건너편에서 사저 쪽으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창마다 커튼이 쳐진 사저는 유령의 집처럼 적막하다. ‘유폐된 여왕’을 떠받드는 지지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얘기를 나눌까. 기자는 ‘박사모’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국민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기 위해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여자가 많았다. 더러 50대 중반의 ‘젊은이’도 눈에 띄었지만, 전반적으로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남자들도 비슷했다. 포스트잇으로 도배된 담벼락 위쪽에 휴대용 소형 태극기와 비닐에 싸인 장미꽃이 어지럽게 붙어 있다. 집회 참가자들은 정치권과 특검, 헌법재판소를 성토하는 한편 언론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한 여자가 박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에 대한 의문을 나타내자 다른 여자가 특검수사를 비난했다.
“실제로 돈을 받지도 않았는데, 돈을 받으려 했다는 것만으로 처벌이 가능한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돈을 받으려 한 것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지.”
한쪽 끝에서 탁자를 놓고 서명을 받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서로 “서명했느냐”고 확인했다. 기자는 탁자에 놓인 태극기를 집어 들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든 참가자가 적지 않았다.
몇 개 소그룹으로 나뉜 집회 참가자들은 대체로 의기투합했으나 가끔 의견 충돌을 보이기도 했다.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었다. 강경파는 헌재의 탄핵 결정에 대한 불복 투쟁은 물론 박 전 대통령의 검찰 출석에도 반대했다. 투쟁 수위를 높여 국민에게 탄핵의 부당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반해 온건파는 힘이 약한 현실을 인정하고 법 테두리에서 투쟁을 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자는 이 사람 저 사람 얘기를 들으면서 더러 대화에 끼어들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미국이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북한이 공격 못해요. 중국보다도 10배는 센데, 뭐.”
“그럼 대통령 선거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모르지, 뭐.”
담벼락에 붙은 포스트잇. ‘대한민국 3대 대통령 이승만, 박정희, 박근혜’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한 여자가 고급정보를 알려준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빈 라덴을 잡은 미국 특수부대가 한국에 들어와 있대요. 이미 미국은 전쟁준비 다 끝냈다네요.”
“미국 의회에서도 (북한을) 가만 놔두면 안 된다는 여론이 있다니까.”
강경파와 온건파는 박 전 대통령의 검찰 출석을 놓고서도 의견 대립을 보였다. 강경파 여자가 “검찰 출석을 하면 안 된다”고 하자, 온건파 남자가 “검찰 출석은 해야 한다. 법을 지키며 싸워야 한다”고 맞받았다.
야권 대선후보에 대한 비난도 쏟아졌다. 뜻밖에도 이들은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보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를 더 경계했다. “똑같이 빨갱이지만, 안희정이 더 나쁜 X”이라고 입을 모았다.
“위장했다는 건가요?”
“그렇지. 완전 위장이지.”
다른 쪽에선 몇몇 사람이 여권 대선후보를 논했다. 기자가 “여권은 마땅한 대선후보가 없지 않느냐”라고 문제를 제기하자, 한 여자가 “김진태 의원으로 몰아줘야 한다”고 했다. 다른 여자가 장단을 맞췄다. 기자가 다시 “김진태로 될까요” 반문하자 이들은 “되게 해야죠”라고 응수했다.
집회 현장엔 도로 양쪽으로 경찰 통제선이 설정돼 취재진과 일반인 접근이 제한된다. 주최 측 인사가 메가폰을 잡고 집회 가이드라인을 설명하고 있다.
최순실 씨를 감싸는 목소리도 들렸다.
“박 대통령이 힘들었을 때 그토록 도와줬잖아. 그러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지, 뭐.”
“그래도 최순실이 나쁜 짓을 안 했더라면 대통령이 저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 아니에요?”
“아니에요. 우리가 알아보니 최순실도 별로 잘못한 게 없더라고. 다 고영태 일당이 꾸민 일이라고.”
한 남자가 바나나 꾸러미를 들고 나타나 참가자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다들 출출한지 마다하지 않았다. 기자도 하나 받아 곧바로 입에 넣었다.
한 무리 속에서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을 폄훼하는 얘기가 시작됐다.
“재판관들 머리가 나빠. 우리 같으면 8대 0이 아니라 6대 2나 7대 1로 결정했을 텐데. 너무 짜고 했다는 티가 나잖아.”
“전날 다들 술파티 하면서 작당했다잖아.”
한 남자가 이정미 전 헌재 소장 대행의 헤어롤에 얽힌 ‘비화’를 꺼내자 여러 사람이 귀를 쫑긋했다. 중언부언했는데, 요지는 ‘전날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 정신을 잃은 탓에 헤어롤 떼는 걸 잊었다’는 것이었다.
집회를 주도하는 측은 준법과 침묵시위를 당부했다. 일부 참석자가 반발했으나 다수의 만류에 물러섰다. 한 참석자가 “우리는 철저하게 애국을 내세워야 한다”고 하자 여러 사람이 호응했다.
언제부턴가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몇 명이 모여 얘기꽃을 피웠다. 한 중년 여성이 다가와 이들에게 언론 인터뷰를 제안했다. 젊은 사람이 해야 더 효과가 있다고 설득했다. 주변에서 반대 의견도 나왔지만, ‘MBC’라고 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MBC는 제대로 보도한다”며.
당연한 얘기겠지만, 담벼락 포스트잇에는 박 전 대통령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글이 넘쳐났다. 몇 가지만 소개한다.
‘진실은 승리합니다. 우리 대통령 만세!’
‘왜 눈물이 나는 걸까요, 건강 잘 챙기십시오, 대통령님.’
‘역사는 당신이 이겼다고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 대통령님 자랑스럽습니다. 종북좌파 무리는 우리 손으로 꼭 처단합니다. 기다려주십시오.’
무리 속으로 들어온 지 1시간 반이 지났다. 일부 참가자는 이곳에서 노숙까지 한다고 했다. 날이 많이 풀리긴 했지만, 길거리에서 자기엔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다. 가슴에 품은 열정이 얼마나 크기에 이 차디찬 보도블록에 기꺼이 몸을 내맡기는 걸까. 기자는 그 ‘순정’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집회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글/ 사진 조성식 기자 mairso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