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기, 괴물/임철우 지음/382쪽·1만3000원/문학과지성사
3년 만에 새 소설집 ‘연대기, 괴물’을 낸 소설가 임철우 씨. 그는 소설을 통해 연속된 수난의 현대사를 주인공들의 연대기로 복원해 나가면서, 고비마다 들끓었던 폭력을 포착해낸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프랑스 파리 시몽크뤼벨리에 거리의 한 아파트에는 거주자들뿐 아니라 사물들까지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인생 사용법’·조르주 페렉) 한국 쪽방촌 노인들은 어떨까. ‘살아온 얘기를 쓰면 대하소설이 나온다’지만 진짜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5·18민주화운동 소재의 명작 ‘봄날’(1997년)의 작자가 3년 만에 낸 이 소설집은 쪽방촌 노인들처럼 스스로는 말할 수 없는, 억눌린 이들의 이야기다.
이전 소설집 ‘황천기담’(2014년)에서 설화적 상상력을 선보였던 저자는 다시금 비극적 현대사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이들에 주목한다.
구순 잔치 대신 60년 전 바다에 빠져 죽은 두 아들의 넋을 건지는 굿을 한 소설 속 노파처럼, 작가도 소설로 억울한 망자들의 넋을 건진다.
“저 평범한 골짜기, 숲, 해변, 모래밭, 웅덩이, 개울, 고목나무, 우물 하나에도 저마다의 이름과 이야기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이야기집’) 금간 술병 하나도 그저 허섭스레기가 아니다.(‘세상의 모든 저녁’) 고독사로 시신이 부패해 가는 왕년의 떠돌이 옹기쟁이가 과거 ‘지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을 생각하며 바닥에 작은 새를 그려 넣었던 술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굴곡과 요철로만 이어진 비포장길, 그나마도 출구 없는 막다른 길”의 인생을 산 이들에 대한 애정이 소설 전반에 배어 있다.
표제작은 구원이 없는 이야기다. 한 노숙인의 투신자살 기사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몽둥이패’(서북청년단) 두목에게 겁탈당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났다. “몽둥이패에 끌려가 수중고혼이 된 그 젊은 사내가 … 어째선지 아이는 얼굴조차 본 적 없는 그 새신랑이 자신의 진짜 아비였더라면, 하고 내심 바란 적이 많았다.” 베트남전에서 정신적 외상과 함께 고엽제 피해를 입은 그는 세월호 참사 뉴스를 본 뒤 ‘괴물’을 목격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철커덩 철커덩, 또는 쿵쾅쿵쾅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이미 죽은 아내(흔적) 또는 곧 죽을 아내(‘간이역’)와 함께 있다. 현실에서는 열차가 목적지에 닿을 것이지만 소설은 그 순간에 멈춘다. “다음 세상에선 … 나무로, 풀 한 포기로, 꽃 하나로 그렇게 피어났다 사라지고 싶소.”(‘흔적’) 소설의 구원이란 그런 것이겠다. 작가의 완숙한 필력은 소설을 넘어 ‘잊지 않을게’라는 말의 윤리를 되새기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