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대 혹은 청와대로 불린 옛 대통령 관저.
지금도 청와대 정문 바로 앞에 선 그 신무문(神武門)을 지나 임금이 가마에서 내리고, 어명에 맞춰 시험문제가 내려졌다. ‘개국(開國) 8번째 회갑’이 주제어였다. 1872년의 음력 7월 22일. 조선왕조 건립 480주년이 엿새 전이었다. 8시간에 걸친 시험 끝에 홍영식을 비롯한 유생들이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스무 살 임금은 세 살 아래 홍영식을 꼭 집어 축하 풍악을 울려주라고 특명했다.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거주하던 우의정의 아들, 12년 뒤 정변으로 삼족이 멸하게 되는 그 홍영식이다.
그날의 경무대 행사로부터 88년 후, 이씨 왕가의 후손이라는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자리를 중도에 물러나면서 12년간 머물던 경무대 관저를 떠났다. 광복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수립까지 미군정청 장관의 관사로 쓰여온 이층 양옥이었다. 광복 이전 총독관저로 지어져 6년간 사용된 최신 건물이었다. 유서 깊은 경무대 자리의 옛 전각들은 그때 사라졌다.
경무대는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 건립 이후, 북문 뒤편에 있던 고려의 별궁(別宮) 일대를 후원(後園)으로 조성하면서 새로 생겨난 구역의 명칭이다. 1392년 7월 16일 개성에서 이성계가 신하의 신분으로 왕위를 찬탈한 이래 남녘 서울은 새 왕조의 도읍이 되었고, 고려의 남경(南京) 땅 이궁(離宮) 앞을 가로막고 신정권의 랜드마크, 경복궁이 개벽하듯 들어섰다. 말하자면 혁명이었다. 그렇게 고려의 왕궁이 조선 왕궁의 뒤뜰이 되면서 경무대도 부산물로 탄생한 것이다.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조선은 멸하고, 새로 등장한 통치권력이 경복궁 앞을 가로막고 전대미문의 엄청난 청사를 세웠다. 조선의 정궁은 조선총독부의 뒷마당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고 한참 뒤 1939년, 경복궁의 뒤뜰 경무대에는 총독의 관저가 들어섰다. 경무대는 이름만 남기고 사라졌다. 오래전 고려 별궁이 그러했듯이. 텅 빈 경복궁 앞에는 총독부, 뒤에는 총독관저가 자리하는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러다 병합처럼 얼떨결에 광복을 맞고,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좌충우돌 끝에 도입되고, 우여곡절 끝에 난생처음 보는 공화국이 탄생했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 그 최초의 대통령 관저는 별 대안 없이 이전 통치자의 관저였다. 정부청사도 총독부청사를 그대로 썼다. 이름은 중앙청으로 바꾸고. 망국과 더불어 소멸한 경무대는 광복의 제1공화국에서 이름만 부활했고 2공화국에서 그 이름마저 소멸했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