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이재명 기자
지난해 4·13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완패하는 데 일조한 ‘존영(尊影) 논란’만 해도 그렇다. 새누리당 대구시당은 공천에서 배제한 유승민 주호영 의원(현 바른정당) 등에게 ‘대통령 존영을 반납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대구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던 조원진 의원이 총대를 멨다. 난리가 난 건 대구가 아니었다.
수도권과 중부권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들은 친박계의 옹졸함에 ‘존영’이란 시대착오적 용어가 맞물려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청와대 참모들에게 “당장 그만두게 하라”며 SOS를 쳤다. 하지만 청와대는 침묵했다. 존영 회수는 박 전 대통령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권력 조기교육’을 통해 응징의 집요함을 체득한 그였다.
집요하게 공격하고, 끊임없이 배제하는 그 속성에 ‘원조 친박’이 모두 떠났듯, 친문의 뿌리인 ‘원조 친노(친노무현)’들도 학을 뗀다. 오죽하면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문 전 대표와 캠프의 태도는 타인을 질겁하고 정떨어지게 한다”고 성토했겠나.
앞으로 안 지사가 어떤 길로 갈지는 자명하다. 친안(친안희정) 진영은 친문과 확실히 각을 세울 것이다. 그래야 문 전 대표가 집권하더라도 다음 대선을 기약할 수 있다. 5년 뒤 ‘정권 교체’ 여론을 뛰어넘으려면 박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 시절 그랬던 것처럼 야당보다 더 독한 비판 세력으로 남아야 한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하루빨리 문 전 대표와 맞붙게 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홍 지사는 기자에게 “나는 만(萬) 수 앞을 내다본다. 앞으로 본선에서 2, 3번 여론이 출렁일 텐데,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했다. 그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대목은 바로 ‘뇌물 정권의 부두목’ 프레임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에 흘러들어간 640만 달러 비자금과 2006년 당시 도박 게임기 ‘바다이야기 사건’이 핵심 타깃이다.
문 전 대표는 최근 내놓은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최순실 게이트’의 ‘적폐세력’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청와대 수석들과 고위 공직자들은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몰랐다는 말로 벗어날 수가 없다. 자신이 알았어야 하는데도 몰랐다는 말로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공직자, 정치인으로서 윤리의식이 마비됐음을 의미한다.”
호남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도 이런 난투극에 적극 뛰어들 것이다. 유권자들은 이미 ‘문재인이냐, 아니냐’의 선택 앞에 놓여 있다. 중도라는 애매한 위치로는 존재감을 잃는다. 본선을 거치며 독이 오를 대로 오를 안 전 대표가 대선 이후 문 전 대표와 협치를 한다는 건 기대난망이다.
그렇다면 다음 정부의 결말도 뻔할 뻔자다. 누가 집권하든 ‘폭망’이다. 가뜩이나 촛불과 태극기 진영은 서로 빈틈만 보이면 핵 펀치를 날리겠다고 노려보고 있다. 여기서 놀라운 정치의 역설이 벌어진다. 태극기 세력의 최대 기회는 문 전 대표의 집권이다. 물어뜯을 준비만 하면 된다. ‘폐족’ 친노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쳐 그렇게 부활했다.
미국에서도 오바마 정부 시절 ‘티파티’라는 극우적 운동이 가장 왕성했다. 공화당 원로이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인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오바마 시대가 미국 역사상 공화당을 가장 성장시켰다”고 말하기도 했다. 극우적인 트럼프 정부의 탄생은 필연적 결과인지 모른다.
집권 이후 폭망이란 ‘뻔한 결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집권 세력의 독주가 상대 진영을 강화시키는 ‘핵심 동력’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상대 진영과의 타협과 양보는 내 진영을 보호하는 일이자, 상대 진영을 약화시키는 길이다. 이 역설을 깨닫는 데서 새 역사는 시작된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