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큰 나라 틈에 있어 늘 누군가에 의지하여 지내 버릇한 까닭에, 나라의 평화를 남만 믿고 있는지라… 남의 나라 힘을 빌려 자기 나라 사람들을 서로 해치는 일이 많이 생겼다.’
조선을 둘러싼 각축전을 보고하는 일본 외무대신의 의회 연설이 독립신문에 실렸다. 1897년 3월 27일자이다. 꼭 120년 전 오늘의 신문 1, 2면을 가득 채운 그 소식에는 전제군주국 조선이 입헌군주국 일본의 내각책임제 정부에 어떤 모양으로 비치는지가 드러나 있다.
‘중국당, 일본당, 러시아당이 서로 해하려는 까닭에 나라에 소란이 많았다. 각색 당파 관원들의 가지각색 거짓말로 국왕은 근 30년간 끔찍이 고생했다. 오늘 남을 죽인 사람이 며칠 못 가 남의 손에 죽으니 조선의 임금과 관인들과 백성들이 어찌 불쌍하지 않으리오.’
‘일본에서는 부당한 형벌을 받은 자에게 국가배상을 하는 법안까지 논의되는 마당인데, 예심(豫審) 기간이 턱없이 긴 조선의 사법제도는 인권유린이라 할 것이다.’(동아일보 1929년 2월 14일자)
일본식이지만 일본과는 질적으로 차이 나는 사법제도의 개선 촉구다. 본공판에 앞서 시행하던 기초 심사로서의 예심 제도는 일본에 비해 몇 배나 지연되어, 형 확정까지 1, 2년을 형무소에서 보내는 것은 예사였다. 예심은 그 자체로 고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인 변호사들은 정례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거론했다. 구속 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속 기간을 연장해가며 장시간 구속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예심판사 부족 등을 핑계로 1, 2개월씩 구속하는 사례가 많다.’(1931년 11월 17일자)
형 확정 후의 복역 기간보다 미결 상태의 구속 수감 상태가 더 고통스럽다는 피의자들의 호소는 사법의 편의에 묻혔다.
‘만약 피의자가 무죄 판결을 받는다면, 장기간의 구속은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권리를 옹호한다는 법률의 원리원칙에 상반되는 것’ 아니냐고 사설은 묻는다. 그런 주장만도 큰 진보였다. 징역이 아닌, 곤장을 쳐서 직접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조선 전래의 태형(笞刑)이 불과 10년 전까지 형벌의 주종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에 걸쳐 사법제도가 완비되고 사법 인원도 확충되고, 사법부 바깥에 국가인권위원회까지 설치 운영 중인 지금, 얼마 전까지의 대통령에 대해 구속부터 하라는 고함이 사법부의 바깥에서 울려 퍼진다.
죄의 성립 유무를 면밀히 가리기도 전에 우선 잡아다 곤장부터 치자는 오래된 무의식의 작용인가. 인신 구속이라는 소송법상의 제한적 절차가 형벌 그 자체처럼 인식되어온 것이 한국적 풍토의 현주소다. 더욱 그렇게 되라고 삼권분립의 사법부를 압박하는 기류가 최근 잇따르고 있다. 정체불명의 여론을 내건 시위에 휘둘릴 때마다 법은 부지불식간에 정치로 점점 다가간다. 그러다가는 세월의 배가 뭍으로 가는 수가 있다.
법이 권력에 아부하면 안 된다는 검찰총장의 메시지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날개 잃은 전임 대통령이 권력인가, 가지각색 여론으로 포장한 무소불위의 전위대가 현존 최고 권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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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