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커다란 인형은 수년 후 낡고 군데군데 솜이 비어져 나와 한사코 안 된다는 조카들과 옥신각신하다 버렸지만, 지금도 버리지 못하는 인형이 하나 있다. 올해 중학교 2학년인 첫 조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는 베를린에 체류 중이었다. 우울한 날이면 지하철을 타고 시내 쇼핑몰로 나갔다 오곤 했는데, 책과 완구를 파는 상점에서 테디베어를 보게 되었다. 옷도 골라서 살 수 있고 원하는 말을 쪽지에 써서 인형의 등에 간직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조카의 건강을 기원하는 문장을 쓴 종이를 솜 사이로 밀어 넣고 내가 직접 몇 바늘 꿰매 봉했다. 인형을 갖고 놀던 조카는 이제 다른 나라에서 살고, 테디베어는 그 애가 지냈던 우리 집 작은방에 놓여 있다. 먼지가 쌓여 가는 채로.
조카들한테 나는 왜 매번 곰 인형을 선물해 주었을까. 그것도 언제나 들뜬 마음으로. 내가 그런 기대서 울 수 있고 웃을 수도 있는, 무섭거나 겁이 날 때 껴안을 수 있는 듬직한 인형 하나 없이 자라서 그랬던 걸까.
지금껏 가져왔고 어쩌면 수시로 바꿔왔을지도 모를 이행대상에 대해 생각해본다. 지금의 나한테는 그것이 종이 책일 텐데, 인생의 여러 가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없이는 그렇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네테 셰퍼의 ‘사물의 심리학’에서 강조하는 말은 이것처럼 보인다. 이 개인적인 현대사회에서는 어른들에게도 어릴 때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던 봉제인형이나 안심담요 같은 사물이 필요하다고. 그런 대상이 필요한 건 어떤 의미에서의 접촉이 필요해서일지도 모른다. 나와 타자, 그리고 나와 세계의.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