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장면을 묘사한 이 그림이 세상에 나오면서 작품 속 등장인물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는 등 불가사의한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 ‘나’는 인근 호화저택에 사는 멘시키라는 의문의 남자와 함께 그림과 야마다 도모히코에 얽힌 비밀을 풀어나간다.
지난달 일본에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68)의 7년 만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사진)는 작가의 명성만큼이나 다양한 화제를 부르고 있다. 두 권을 합쳐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초판으로 130만 부를 찍었고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다. 난징대학살에 대한 언급 때문에 일본 우익들의 공격을 받고 있기도 하다. ‘책이 너무 보고 싶다’며 훔친 회사원이 체포된 사건도 있었다.
작가는 여기에다 20세기 초 독일의 오스트리아 침공, 난징대학살 등 역사적 사건을 불러들인다. 야마다는 오스트리아 빈 유학 시절 현지 애인과 지하조직에 소속돼 독일 고관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다. 현지 애인은 처형됐고 유력가 자제인 그는 입막음을 당한 채 일본에 돌아온다. 피아니스트였던 동생은 난징대학살에서 살인에 가담한 자책감에 일본에 돌아와 자살을 택한다.
과거의 상처에 힘들어하는 것은 현재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나’는 학창 시절 동생을 잃고 아내로부터 위안을 찾으려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멘시키는 세상을 떠난 애인을 잊지 못해 애인의 옷을 모아놓고, 자신의 딸일지 모르는 여자아이의 주변을 맴돈다.
중반까지 작업실을 중심으로 다소 불안하게 이어지던 이야기는 후반부에 모험소설로 바뀐다. 주인공은 죽은 동생과 동갑인 여자아이를 지키기 위해 지하세계로 내려가 ‘내면의 두려움’과 맞선다. ‘이데아’(이상)를 자처하는 기사단장이 스스로를 희생하며 그를 돕는다. 그렇게 ‘희생’과 ‘시련’을 거쳐 ‘재생’의 길을 걷는다.
작가는 30대 주인공의 시선에서 섬세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며 여전한 에너지를 보여준다. 마라톤으로 다져진 체력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소설 곳곳에서 나이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주인공은 e메일도 쓰지 않고, 인터넷도 하지 않고, 휴대전화도 없다. 친구는 카세트로 음악을 듣기 위해 오래된 차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쓴다. 정보기술(IT)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다’며 거리를 두는 기색이 역력하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