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난 사람]운동권 이론가였던 前 민노당 정책위의장 주대환 씨
‘뉴레프트’ 역사관을 제안한 주대환 씨는 최근 서울 종로구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나 “박정희 모델이 성공했다는 것을 쿨하게 인정하자”며 “그러나 그 성공은 대한민국이 ‘농지개혁’에 성공한 평등한 나라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A 씨 같은 이들이라면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나무나무)를 읽어볼 만하다. 2004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으로 일하는 등 오랫동안 운동권 ‘이론가’로 활동했던 저자 주대환 씨(63)의 강연을 묶은 책이다. 그의 이력을 언뜻 보면 책이 대한민국의 어두운 면에 포커스를 맞췄을 것 같다. 하지만 최근 만난 그는 “식민지 종속국 시절의 독립운동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 평등한 나라로 출발한 대한민국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 행사. 동아일보DB
실제 제헌국회의원 선거는 투표율이 매우 높아 유엔 선거 감시단도 놀랄 정도였다. 주 씨는 “김구 선생에 대한 높은 평가는 건국 시기 정치가로서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고난에 찬 독립운동을 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농지개혁은 성공적이었다. 주 씨는 “대한민국은 농림부 장관이었던 죽산 조봉암이 설계하고 인촌 김성수 선생이 도운 농지개혁이 성공하면서 유례없이 평등한 나라로 출발했다”며 “6·25전쟁의 영향까지 더해져 전근대적 신분 질서의 잔재가 청소됐다”고 말했다. 소작농은 소출의 30%를 5년 동안 내는 지극히 유리한 조건으로 소유권을 얻었다. 농지개혁은 중국처럼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 혁명’의 성격도 있었다. 그는 “6·25전쟁에 징집된 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웠던 것은 그들이 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 완료된 농지개혁으로 자기의 땅을 갖게 된 자영농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촌은 한민당의 실질적인 오너였지요. 그런데 대세로서 농지개혁을 받아들입니다. 인촌이 하자고 하니까 중소 지주들도 꼼짝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주 씨는 책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었던 인촌을 ‘당대의 조정자’라고 했다. “인촌은 나중에 부통령은 잠시 하지만 국회의원은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신익희와 조봉암을 밀어줬습니다. 인촌이 건국 과정에서 한 것을 보면 조정자 역할입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인촌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 “낡은 진보의 ‘허깨비 잡기’ 놀음서 벗어나야”
주 씨는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려 한다는 점, ‘후진국형 진보’를 주된 논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뉴라이트’적 시각과 비슷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발 독재’에 대한 평가에는 궤를 달리한다.
주 씨는 “유신 이후 1987년 6월 민주화항쟁까지 민주 헌정의 중단, 그 이전부터 시작된 노동자에 대한 인권 유린과 탄압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또 “반공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뉴라이트 운동이 보수의 무엇을 혁신했는지 의심스럽다”고 덧붙였다. 그는 386세대 중 일종의 ‘분열증’을 앓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사상과 남미에서 수입된 종속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식민지반봉건론’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도 1980년대 중후반까지 마오쩌둥 사상의 자장 아래 있었다고 말했다.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은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 운동권들은 한국 경제가 (신)식민지적 상황에 있다고 봤습니다. 즉, 제국주의 자본에 의해 수탈을 당하고 있고, 곧 외채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지거나 아니면 성장의 한계에 부닥치게 될 것이라고요. 당시 쟁쟁한 진보 학자들과 논객들이 한국 자본주의 성격 논쟁을 했지만 민족경제론과 식민지반봉건론의 큰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대한민국 건국을 전후한 시기에 이미 일어났는데 말이지요.”
“‘북한 의존파’가 득세한 이유는 ‘전두환이라는 악마’를 몰아내기 위해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을 듯한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북한의 물리적, 군사적 힘에 끌렸지만 점차 생각을 그 방향으로 발전시키니 나중에는 북한이 역사적, 도덕적 힘도 가진 것으로 믿어 버린 것이지요. 의존파는 ‘악마가 만들어 놓은 괴물’인 셈입니다. 이 같은 생각을 지녔던 이들이 장년이 돼 야권의 중추 세력이 됐지요.”
○ “임정계와 전향한 공산당계의 건국 참여 봐야”
주 씨는 학생운동에 NL, 민중민주주의(PD)파가 등장하기 이전 지하서클 연합체의 멤버였다. 이 연합체는 나중에 ‘무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는 고향인 경남 마산에서 부마항쟁에 관련된 혐의로 중앙정보부의 수사를 받다가 10·26사태를 맞았다.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가 ‘서울의 봄’을 앞두고 풀려났고, 1980년대에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87년을 전후해 한국 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을 인정했고, 1990년대 초반 혁명노선을 완전히 버렸다고 했다.
1992년 한국노동당 시절부터는 ‘민주주의를 통해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사회민주주의자로 활동했다. “말하자면 영국 노동당과 같은 노선을 가야 한다는 것이었죠.”
2004년에는 민주노동당 내 소수파로 정책위의장에 당선됐지만 소수파로서 NL파와 갈등했다.
“정책위의장 시절 북한 인권 단체에서 강의를 했어요. 그리고 당에 돌아오면 ‘왜 미국 중앙정보국(CIA) 돈 받아서 운영되는 그딴 단체에서 강의를 하느냐’고 해요. 민주화운동 시절 국제 인권 운동의 도움을 얼마나 많이 받았습니까? 유럽에서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계열 진보정당이 북한 인권 개선에 더 적극적입니다. 미국은 민주당이 더 적극적이고요.”
주 씨는 2012년부터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이사로 활동했고, 지금은 부회장이다. 그는 자신이 제안하는 역사관을 ‘뉴레프트’라고 말했다. 뉴라이트가 이승만 대통령을 우상화하는 것과 달리 뉴레프트는 공산당에서 전향한 죽산 조봉암, 임시정부계를 떠난 해공 신익희, 그리고 민족자본의 대표이자 지도자인 인촌이 함께 건국한 게 대한민국이라는 평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신익희, 조봉암 선생은 각각 임정계와 공산당의 2인자 정도 되던 사람입니다. 이들이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했다는 것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어요. 이들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돼야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이 바로 세워집니다.”
현실 정치에 대한 날선 비판도 이어졌다. “시민들은 벗어났는데 야권은 여전히 낡은 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로 하고 있습니다. 20, 30대에게 이 같은 ‘후진국형 진보’ 사관을 물려줄 수 없습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주대환은…
1954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마산중고교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1979년 부마항쟁을 비롯한 여러 사건으로 투옥됐다. 1987년 전후 시기에는 ‘김철순’이라는 가명으로 혁명을 선동하는 글을 썼다. 1992년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장, 2004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으로 일했다. 2008년부터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