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흰색 심포니 3번’
낯선 시도에 미술계의 비판이 거세기도 했습니다. 그림과 제목의 연관성이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였어요. 게다가 이상한 제목의 그림들은 당대 보편적 미술과도 많이 달랐습니다. 그림은 교훈이나 이야기를 전하는 데 무심했고, 구성과 마무리도 거칠었지요.
‘미술은 서사적 요소나 감정 표현 없이 조형적 요소 특히 색채 조화만으로 충분히 독립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 화가는 적대적 비평가들에게 예술적 확신으로 응수했습니다. 같은 음이라도 악기와 배음에 따라 다르게 전달되듯, 같은 색도 화면 구성과 이웃 색과의 관계 속에서 색다름을 뽐낼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그림을 제목과 달리 흰색만 사용해 그리지 않았다며 비판하는 이도 있었어요. 이에 화가는 F장조 심포니라고 계속 F음만 연주되는지를 반문하며 맞섰습니다. 그림 제목에만 집중해 색채 중첩과 반복이 화면 위에 만들어 내는 음악적 효과를 간과한 비평가의 아둔함도 지적했어요. 그림 속 흰색은 당시 화가들이 캔버스 바탕칠에나 사용하던 불완전한 색이 아니었습니다. 순수한 조형성에 닿고자 한 화가가 선택한 예술적 디딤돌이었지요.
노숙인 인문학이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첫 시간, 풍경 밑그림을 자유롭게 색칠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흰 빈칸을 흰 크레파스로 색칠하는 수강생이 있었습니다. 사뭇 엄숙한 분위기에 자신만의 리듬과 선율에 맞춰 색채로 빈 캔버스에 의미를 부여했던 화가를 떠올렸습니다. 정성껏 색칠에 몰입 중인 수강생이 불운과 실수가 삶에 남긴 얼룩덜룩한 상처를 지우는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경건해 보였습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