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김재철 에스텍파마 사장
김재철 에스텍파마 사장은 “가족 같은 직원의 고용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것이 기업가의 기본 책무”라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김상철 전문기자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자 아버지가 어린 자녀들(3남 1녀)에게 당부했다. 탄광 소장을 지낸 아버지는 인쇄소를 운영해 번 돈으로 금광 개발에 나섰다가 빚까지 지게 됐다. 정든 서울 약수동 한옥을 떠나 무허가 판자촌으로 옮겼다. 초·중학생 때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제때 못 냈다.
운동을 좋아했지만 공부도 곧잘 해 고려대 이과(理科)계열에 진학했다. 취업에 유리하다는 얘기를 듣고 2학년 때 전공을 화학과로 정했다. 대학 시절 야학(夜學) 교사로 주경야독하는 또래 청년들에게 중고교 과정을 가르쳤다.
피부염치료제와 스테로이드제 등을 동료와 개발했다. 약국을 찾아다니며 영업도 했다. 성공할 자신이 있는 의약품 개발을 제안했다. 그러나 새 장비와 인력이 필요한 건의는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자부심에 상처가 생기자 뜨겁던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해야겠다.”
단순한 생각으로 약 10년간 일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결심한 뒤 바로 행동에 옮겨 창업 준비는 안 돼 있었다. 아버지의 당부가 떠올랐지만 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일단 도전하기로 했다.
1992년 퇴직금 500만 원과 빌린 500만 원을 밑천으로 서울 강남구 포이동에서 33m²(약 10평) 남짓한 사무실을 세내 한쪽에 실험도구를 놓고 원료의약품 개발 사업에 나섰다. 김재철 에스텍파마 대표이사 사장(57) 이야기다.
녹십자 계열사인 녹우제약에서 위궤양치료제 원료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분말이 돌처럼 굳어져 원인을 찾아내 다시 만드는 등 2년 6개월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제품을 개발했다. 1996년 유럽에서 전량 수입하던 위궤양치료제 원료를 처음으로 국산화했다. 이를 납품해 매출 2억 원을 올렸다. 기술보증보험과 기업은행에서 3억 원을 빌려 경기 군포에 330m²(약 100평) 규모의 임대공장을 마련했다.
오리지널 약의 특허가 끝난 뒤 처음 내놓는 복제약인 퍼스트 제네릭에 도전했다. 1997년 소염진통제 ‘아세클로페낙’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하고 양산 기술도 확보했다. 이어 혈전치료제(트리플루살), 근육이완제(아플로쿠알론), 자기공명영상(MRI)조영제(GDM, GDA)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소염진통제 ‘아세메타신’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빈혈치료제(폴리사카라이드 철착염)와 당뇨병치료제(글리메피리드)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호사다마일까. 국내 제약회사의 요청으로 제품을 개발하다 취소 통보를 받았다.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인 상태라 손해가 컸지만 갑을관계여서 마땅한 대응책이 없었다. 활로를 찾아 해외로 눈을 돌렸다. 마침 일본 제약회사가 파킨슨병치료제 개발을 주문했다. 까다롭지만 규모가 큰 선진국 시장에 진출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벤처기업과 협업해 2년 만에 파킨슨병치료제 ‘드록시도파’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했다. 고품질 원료를 싸게 만들 수 있는 새 제조법도 확보했다. 일본 원료의약품 업체가 못 만든 제품을 내놓자 일본 제약업계의 시선이 달라졌다. 이를 계기로 천식치료제(프란루카스트), 위궤양치료제(레바미피드) 등을 일본 제약회사에 공급하게 됐다.
해외 수출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2008년 cGMP(미국 의약품 제조관리 기준) 공장을 경기 화성에 세웠다. 안산공장이 있는데 연매출과 맞먹는 250억 원을 들여 또 공장을 짓자 무리라는 우려가 나왔다. 주위의 걱정에도 도약할 적기라고 판단해 과감하게 투자했다. 기술력에 첨단 설비까지 갖추자 글로벌 제약회사들이 신약을 대신 생산해 달라고 맡겼다.
김상철 전문기자 sckim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