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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 끼니도 영화도… 폭 50cm 책상서 해결하는 ‘취업 고행’

입력 | 2017-04-12 03:00:00

[청년에게 일자리를/청년이라 죄송합니다]1부 ‘노오력’의 배신
동아일보 기자 ‘독서실 원시인’ 사흘 체험기
검은색 패딩-고무줄 바지-슬리퍼… 원시인 차림으로 적막한 책상에 앉아 편의점 도시락-컵밥 먹으며 공부
아침 8시~밤 11시 수도승같은 생활… 동료들 “뭐하나 싶지만 어쩔수 없죠”




사회부 위은지 기자가 3일간 생활한 서울 동작구 독서실 책상에 스탠드가 켜져 있다. 원시인들은 이런 공간에서 규율을 지켜가며 미래를 준비한다(왼쪽 사진). 위 기자가 원시인 차림으로 노량진 거리를 걷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봐야 할 것은 정확하게. 어렵게 안 나온다.’

옆에 앉은 최금옥(가명) 씨는 식사 시간에도 자리를 지켰다. 독서대에는 마음을 다잡게 하는 이런 문구의 메모지가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그는 오후 10시가 돼서야 자리를 떴다. 기자가 독서실에 머문 사흘 동안 그는 앉은 자리에서 김밥이나 간식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울 뿐 식당에 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공시생’(공무원 시험 응시생)과 취업준비생들이 의지를 다지던 3월 말. 기자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의 한 독서실에서 사흘간 ‘독서실 원시인’으로 살았다. 취업을 위해 독서실에 정착한 청년들이 왜 ‘원시인’으로 불리는지 알고 싶었다.

▽원시인과 만나다=
첫날 오전 7시 50분. 노량진역 4번 출구. 처음부터 실패다. 꽃무늬 블라우스에 카디건을 걸친 기자는 ‘외계인’이었다. 원시인들은 한결같이 검은색 패딩점퍼에 두꺼운 후드티를 겹쳐 입고 고무줄 바지 아래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적막을 마주하다=“소리에 민감한 분들이 있어요. 조심해 주세요.” 독서실 총무는 4번 책상으로 안내하며 이렇게 당부했다. 칸막이 책상 30개가 빼곡히 들어찬 독서실에서 허용된 공간은 폭 50cm의 책상뿐. 가방 지퍼 소리가 이렇게 큰 줄 미처 몰랐다. ‘파도 소리’가 나는 ‘백색소음기(집중력을 높여주는 소리를 내는 장치)’가 유일하게 허가된 소리였다. 50cm 내에서 규율을 지켜가며 버텨야 했다. 영어 단어장을 펼쳤다. 5분 만에 졸음이 밀려왔다.

▽원시인이 되다=둘째 날. 기모 후드티에 검정 고무줄 바지를 입고, 패딩점퍼를 하나 더 걸쳤다. 50cm가 익숙해졌다. 암기 속도도 빨라졌다. 틈틈이 노는 것도 가능했다. 스탠드를 끄면 노트북(인터넷 강의 시청용)은 영화 스크린이 됐다. 놀아도 독서실이 편했다. 가족의 눈치와 부러운 친구들이 있는 집과 학교보다는.

▽원시인 경제특구=노량진에서는 3000∼4000원이면 한 끼를 때울 수 있고, 아메리카노는 1000원이면 충분했다. 편의점에서 3900원짜리 불고기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그래도 지출 수준은 해마다 치솟는다.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박모 씨(29)는 고시원비 25만 원, 독서실비 15만 원, 학원 수업료 24만 원에 교재비와 생활비까지 매달 100만 원을 쓴다고 했다.

▽원시인 확장의 ‘범인’=공시생들의 쉼터, 사육신공원을 산책했다. 3년간 다니던 민간기업을 그만두고 지난해부터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이모 씨(34)를 만났다. “사기업은 오래 다니기 어렵더라고요. 무엇보다 경쟁과 야근에서 벗어나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공시생은 25만7000명(지난해 기준)으로 5년 전보다 38.9%나 증가했다. 전체 청년 취업준비생은 62만8000명이다. 만약 이 씨가 다녔던 민간기업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했다면, 그는 원시인이 될 필요가 없었다. 중소기업의 임금이 높아진다면, 박 씨가 매달 100만 원을 써가며 7급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진 않았을 것이다.

휴게실에서 만난 최휘웅 씨(31·경찰 시험 준비)도 “요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오는 ‘공딩족’과 40대도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무원과 대기업 일자리를 얻으려면 1∼2% 확률을 뚫어야 한다. 결국 대다수가 가는 일자리는 비정규직이거나 월급이 적고, 연간 2113시간을 일해야 하는 우리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그것이 바로 원시인 세계를 확장시키는 ‘범인’ 아닐까.

▽인류로 진화하고 싶다=마지막 날 저녁은 고시식당에서 먹었다. ‘혼밥’이 참 편해졌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데도 원시인들과 묘한 동지애가 생겼다. 원시인들은 여가와 취미도 독서실에서 한 방에 해결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효율적인 존재였다. 하나의 목표에 모든 리듬을 맞추고 가장 효율적인 공간에서 ‘진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인류가 되려는 그들의 진화를 우리 사회와, 노동시장이 막고 있었던 건 아닐까.

“도대체 뭘 위해 이걸 하나 무기력해질 때가 있어요. 그래도 독서실에 머물러야 해요. 원시인으로 공부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고 마음도 제일 편하거든요.”

마지막 날 밤.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김모 씨(25·공인회계사 준비 중)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도 60만 명의 취업준비생이 독서실과 고시원, 도서관에서 원시인으로 살아간다. 그것이 ‘정규직 인류’로 진화하는 데 가장 효율적이고 유일한 길이라고 믿기에.

위은지 기자 wiz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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