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놀땐 노는 천재형이라면 그는 야구밖에 모르는 노력형 … 너를 좌타자로 만든 데도 영향 끼쳐… 너의 야구는 이제 걸음마지만 나를 넘을수 있다 너도 노력형이니”
넥센 신인 이정후가 8일 두산 유희관을 상대로 친 프로 데뷔 후 첫 홈런 공. 넥센 제공
3년 전이었다.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한 휘문고 1학년 이정후(19·넥센)에게 “어떤 선수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본인 선수 스즈키 이치로(44·마이애미)라고 답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아버지 이종범(47·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였다. 하지만 이종범이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를 펄펄 날아다니며 전성기를 구가할 때 이정후는 너무 어렸다. 야구가 뭔지를 알기 시작할 무렵 이종범은 선수로서 이미 하향세를 보이고 있었다. 반면 이치로는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이정후가 아버지의 진면목을 알게 된 건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예전 프로야구 영상을 본 이후다. 이종범은 “그때 아들이 처음으로 ‘아빠, 정말 대단했었네’라고 하더라”며 웃었다.
넥센 신인 이정후가 8일 두산 유희관을 상대로 친 프로 데뷔 후 첫 홈런 공. 넥센 제공
아버지로서, 또 야구 선배로서 섭섭하진 않을까. 이종범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나와 이치로는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고도 했다.
1995년 한일 프로야구 슈퍼게임을 앞두고 만난 이종범(왼쪽)과 스즈키 이치로. 동아일보DB
이에 비해 이치로는 ‘노력형’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스스로와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수십 년째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머릿속에는 오직 야구밖에 없다.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메이저리거로 뛸 수 있는 이유다. 이종범은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존경스럽다”고 했다. 이종범이 이치로에게 부러웠던 것은 또 하나 있다. 바로 왼쪽 타석에 들어서는 것이다. 왼손 타자는 타격과 함께 1루로 내달릴 때 오른손 타자보다 유리하다. 타격 후 홈 플레이트 건너편에서 스타트해야 하는 오른손 타자보다 더 짧은 거리를 달린다. 빠른 발을 가진 이치로는 이 점을 활용해 수백 개의 내야안타를 만들어냈다.
사실 타고난 왼손잡이는 이종범이다. 지금도 야구를 빼곤 모든 걸 왼손으로 한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할 때 왼손잡이용 글러브가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오른손으로 야구를 배웠다. 이에 비해 오른손잡이였던 이치로는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우투좌타(던지는 건 오른손, 치는 건 왼쪽 타석에서 하는 것)로 변신했다. 이종범은 “만약 내가 왼손잡이로 야구를 했다면 훨씬 재미있는 일이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정후가 아버지의 벽을 넘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체격 조건과 두둑한 배짱, 그리고 마인드를 보면 불가능해 보이지만도 않는다. 무엇보다 이종범이 인정하고 있다. “정후는 천재형보다는 노력형”이라고.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