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디자이너 이수원은 “나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스타일리스트는 배우만 돋보이게 하면 되지만, 의상디자이너는 배역, 즉 캐릭터를 돋보이게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배우의 호불호가 아니라 연출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미국에서 무대의상을 제대로 공부했다. 의상디자이너가 정당한 대접을 못 받고 있어 화가 날 때도 적지 않지만 일만큼은 너무 재미있다고 말한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혹시 의상디자이너는 연극판에서 소외를 당하나요? 예전에 인터뷰한 자료를 찾아봤는데 하나도 없어서… ”
그러자 그는 바로 속내를 털어놨다.
그의 대답이 하도 진지해 다시 물었다. 무슨 기분 나쁜 경험이라도 있는가.
이 질문을 듣고 그는 ‘처음부터 너무 세게 얘기했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편이 ‘하고 싶은 말의 60%만 하라’고 했는데…”라며 슬쩍 눙쳤다. 분명, 그는 집에서도 의상디자이너로서의 ‘애환’을 가끔 입에 올리나 보다.
나는 그의 걱정을 덜어줬다.
“특정인을 거명하는 것도 아니고, 전문가로서 실제로 있는 애로사항을 얘기하는 건데요, 뭘.”
그는 “의상디자이너라고 하면 종종 ‘배우들을 만날 수 있으니 재밌겠다’고 한다. 그런 재미는 없다. 내 직업은 배우를 만나는 게 아니다. 나를 스타일리스트와 혼동한다. 스타일리스트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하는 일이 다르다는 것이다. 스타일리스트는 배우를 돋보이게 하는 사람이지만, 연극의 의상디자이너는 배우가 아니라 배우가 맡은 배역을 돋보이게 하는 사람이다.”
그 말을 들으니, 그가 왜 정색을 하는지 이해가 간다. 사실, 나도 의상디자이너의 역할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다, 살짝 스타일리스트와 혼동하고 있었으니.
그는 어쩌다 연극의 의상디자이너라는, 매우 독특한 직업을 갖게 됐을까.
그는 고교 2년까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미국 오리건 주로 유학을 갔다. 한국 학생은 혼자였다. 꿈은 화가였다. 영어를 더 빨리 배우려고 연극반에 들어갔는데, 뉴욕 브로드웨이로 실습여행을 간 게 그의 인생을 들었다 놨다. 대사는 귀에 안 들어왔지만 무대와 의상은 눈에 들어왔다. 같은 오리건 주에 있는 포틀랜드 주립대의 회화과에 들어갔다가 휴학을 하고 잠시 귀국했다. 혼자 하는 예술보다 협동하는 예술분야로 진로를 바꾸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제일기획에서 인턴으로 6개월을 일했다. 주로 복사하고 커피 타는 일이었지만 온 지방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기업행사에 참여한 게 큰 공부가 됐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주 시애틀의 코니시 예술대(서부의 줄리아드로 불린다고)에 들어가 무대디자인과 무대의상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꿨다. 대학원은 오하이오 주 켄트 주립대로 진학해 역시 무대의상학을 공부했다.
물론 그에게 나쁜 기억만 있을 리 없다. 2004년 귀국해서 친구의 소개로 처음 참여했던 대학로의 뮤지컬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연출 노우성)는 ‘아직도 첫사랑이자, 늘 함께 하는 추억’이다.
“이 작품을 통해 대학로라는 공간을 알게 됐고, 무대작업을 하면서 남편도 만나고, 지금까지 10년 넘게 함께 작업중인 어시스턴트도 만났다. 힘들고 속상할 때 전화 한통으로 위로도 받고, 웃음도 나눌 수 있는 깊은 인연들을 그 때 만난 것이다. 그 작품을 20번은 본 것 같다. 언젠가 그 때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모여 다시 해보고 싶은 작품이다.”
2014년에 공연한 뮤지컬 ‘셜록 홈즈:앤더슨가의 비밀’에서 홈즈 역을 맡은 김도현. 이수원은 그의 붉은 재킷에 대해 추리력은 홈즈의 심장이고, 그 심장이 뛰는 느낌을 살려 패턴을 디자인했다고 밝혔다. 재킷의 색깔은 무대 디자인 콘셉트와도 통한다. 당시 무대는 붉은 색깔이어서 의상은 이를 피하려 했으나, 노우성 연출과의 논의를 통해 아예 붉은 계통으로 통일했다고. 기획사 알앤디 제공
인연이란 소중하다. 이 작품을 연출했던 노우성 연출은 2012년과 2014년 뮤지컬 ‘셜록 홈즈’를 연출하며 의상을 그에게 맡긴다. 의상은 호평을 받았다.
무대 의상은 만드는 과정이 궁금하다(복잡하다. 그래도 의상디자이너의 본업이나 구체적으로 적시하겠다).
“연출이 의뢰를 하고, 대본을 본 뒤 오케이를 하면 일이 시작된다. 첫 회의에는 연출과 무대감독, 다른 디자이너들(조명, 음향, 영상, 분장, 소품 등등), 기획 등이 참석한다. 회의가 끝난 뒤 연출과 따로 만나 디자인 콘셉트를 잡는다. 배우들 전체와 상견례를 하고 대본을 처음 읽는 첫 리딩에도 참석한다. 연출과 배우들을 다시 만나보고 자료 조사와 연구 등을 거쳐 의상 스케치를 해서 갖고 간다. 리허설을 보고 배우들을 만나 치수를 잰다(직업어로는 채촌(採寸)을 한다고 한다). 배우들과 캐릭터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배우들의 신체 특징을 관찰한다. 다시 스케치도 하고 수정도 하고, 리서치도 더 디테일하게 해서 연출이나 기획에게 견적서를 제출한다. 예산에 맞춰 디자인을 수정한 뒤 동대문시장에서 원단을 고르기도 하고, 다른 의상을 사서 리폼도 한다. 1차 시제품을 만들어 가봉을 한다. 런쓰루(처음부터 끝까지 중단하지 않고 실제처럼 하는 연습)를 보고 2차 피팅을 한다. 장식 등을 달아 드레스 리허설(옷을 실제로 입고 하는 연습)을 해 보고 다시 수정을 한다. 염색, 장식 등을 끝내고 극장에 납품한다. 테크니컬 리허설(3,4번)을 해 보고 또 수정한다(염색을 다시하거나 드레스 길이 조정 등). 오픈 전에 파이널 드레스 리허설을 한다. 실제 연극이 시작되면 일주일 정도 극장에 상주하면서 수정 요청이 오면 그때그때 수정한다. 그 후에는 극단이나 극장의 의상진행팀(워드로브)이 맡는다. 연극이 끝나면 깨끗이 세탁해서 돌려주거나 버리기도 한다(큰 기획사는 자체 창고를 갖고 있다).”
그러니 의상에 애착을 갖는 게 당연할 듯하다.
“나에게는 내가 만든 의상이 예술품이다. 예술품은 걸어놓고 보지 않는가. 배우들이 의상을 벗어 바닥에 팽겨 쳐 놓고 그냥 나갈 때는 자존심이 상한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서로에 대한 예의가 있었으면 좋겠다. 3년 전에는 너무 마음이 상해 욕을 해가며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나를 뭘로 보고 말야’라며 큰소리로 화를 낸 적도 있다.”
너무 부정적인 얘기만 하는 것 같긴 하지만, 이수원 디자이너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드문 일이니 그가 겪은 얘기를 좀더 들어보기로 하자(보통은 안으로 삭히고, 겉으로는 그럴듯한 말만 하지 않는가). 이 인터뷰를 통해 연출이나 배우들이 디자이너들의 애로를 알고 서로 배려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그는 내 질문에 몇 가지 사례를 털어놨다.
그가 만든 의상을 입은 어떤 배우가 너무 뚱뚱해 보인다는 누군가의 댓글 때문에(그 배우는 원래 뚱뚱했고, 극에서 뚱뚱하게 보여도 문제가 없는 역이었다고) 다음날 낮 2시까지 의상을 바꾸라는 말을 그 전날 밤 11시 반에 통보받고 밤을 새워 새 옷을 만들던 일, 어느 배우가 ‘내 옷은 내가 가져오겠다’고 말하는 걸 듣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던 일 등을 들려줬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배우가 그가 만든 의상을 안 입고 무대에 올랐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 그는 그 배우가 안 입은 의상을 깨끗이 세탁해 A4용지 2장의 편지와 함께 보냈다. 편지에는 그 의상의 콘셉트에 대한 생각을 자세히 적었다. 그 배우는 결국 그 의상을 입었다.
이런 일들은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는데….
“의상을 건네 줬을 때 ‘내 몸에 안 맞는다’거나 ‘캐릭터와 안 맞는다’고 하는 배우들이 있다. 그런 말을 내게 직접 해서는 안 된다. 연출에게 하는 것이 옳고, 연출이 내게 말을 하는 게 맞다. 배우와 이견이 있을 때는 캐릭터를 어떻게 분석했는지, 디자인의 의도는 무엇인지를 충분히 설명해주려고 노력한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연출의 뜻이라고 강조했다. 배우는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작품 해석이나 캐릭터 분석 권한이 연출에게 있고, 배우와 모든 디자이너들은 연극 전체의 성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연출의 의도를 중시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봄날’에서 출타했던 아버지(오현경)가 돌아와 아들들을 꾸짖는 장면. 아들들의 옷은 비슷해 보이지만, 염색의 농담(濃淡)으로 차이를 만들었다. 소처럼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장남의 옷이 가장 진하다. 흙이 많이 묻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동생으로 내려갈수록 엷어진다. 이수원은 개인적으로 염색작업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극단 백수광부 제공
“한 캐릭터에 보통 두벌 정도의 의상을 준비하는 데 L연출과 작업할 때는 4,5벌을 준비하고, 오픈날까지도 미세하게 염색을 바꾸는 경우도 많다. 대사 한줄, 동작 하나만 바뀌어도 거기에 맞춰 의상까지 바꿔야 캐릭터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즐거운 복희’를 할 때다. 등산점퍼를 입은 복희의 모습을 10초 정도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 짧은 장면을 위해 길이와 색깔, 질감이 다른 점퍼 5벌 이상을 준비했다. 오픈 하루 전에 연출이 원하는 점퍼를 정해 공연에 올렸다.”
그래 그런지 그는 “실패와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는 질문에 지체 없이 답했다.
“연출이 ‘의도한대로 잘됐다’고 하면 성공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고생한 피로가 다 풀린다. 너무 고통스러워 다시는 애를 안 낳는다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 잊어버리고 다시 애를 갖는 것과 비슷하다.”
그는 “같은 대본을 읽고도 연출, 디자이너, 배우가 생각하는 캐릭터가 다 다를 수 있다. 공연은 여럿이 협력하는 작업이라서 양보할 수도, 타협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실, 고집이 상당히 센 디자이너다.
“타협은 할 수 있지만 옳지 않은 타협을 해서는 안 된다. 후배들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려면 쉽게 타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관객들의 이해를 도와주는 역할이다. 이때는 도와준다는 말을 써도 될 것 같다. 작가가 글을 쓸 때 잘 팔리길 바라면서 글을 쓰기보다는 우선은 자기 생각을 쓰지 않느냐. 나는 그런 작가를 지지한다. 요즘은 너무 관객을 의식하는 것 같다.” 의상도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대학원 재학시절, 매사추세츠 주의 윌리엄스타운 씨어터 페스티벌(여름축제)에서 매년 3개월씩 3년간 인턴으로 일한 적이 있다. 무대의상제작소에서 디자이너 어시스턴트로 일했는데, 그 때의 디자이너가 바로 한국계로 세계적인 무대의상 디자이너인 윌라 김(한국명 김월라·지난해 12월 작고)이었다. 윌라 김은 토니상과 에미상을 각각 두 차례 수상하고, 무대예술가의 최고 영예인 ‘무대예술의 전당’에도 헌액된 무대의상계의 대모였다. 한국에서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김영옥 미 육군 대령의 누나이기도 하다).
이수원은 말한다.
“그 분의 말 중 제 마음에 가장 와 닿는 것은 ‘무대의상 디자이너는 옷을 만들어 보여주는 패션디지이너와는 달리, 존재하는 스토리를 더 구체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즉 무대의상 디자이너는 의상이라는 도구를 통해 무대라는 공간 위에 올라간 각 캐릭터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그들의 삶과 그들만의 스토리를 표현해 주는 예술인이라는 것이다.”
한국에는 그런 롤 모델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도 정확히는 모른다. 서울에만 20,30명 정도가 일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요즘은 무대의상도 분화를 하고 있다고 한다. 연극, 뮤지컬, 오페라, 창극, 현대무용, 어린이극 등등으로.
그럼 배우려는 사람은.
“후배양성이 어렵다.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게 안타깝다. 배워야만 하는데, 리스펙트(존중)을 받으며 사는 게 힘드니 권하기도 어렵다. 대학에서도 의상교육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는 용인대 연극학과에서 5년째 강의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연극학과내에 무대의상전공이 있었으나 지금은 무대의상 제작실습으로 축소됐다. 그 전에는 상명대 무대미술과, 청주대 패션디자인과에도 출강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윌라 김과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너 의상 말고 딴 거 잘하는 것은 없니? 체력 소모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힘든 직업이다. 달리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그거를 해라.”
무대의상계의 전설이 그런 말을 할 때는 매우 섭섭했다고 한다. 내가 뭘 잘못했지, 하고. 그러나 지금은 이해한다.
“내 일은 너무 행복하다. 집중할 수 있는 일이고, 공동으로 하는 일이고, 보람도 크다. 그렇지만 제자들에게 윌라 김이 내게 한 말을 똑같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직 한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아마데우스’는 의상을 만들 때 고증을 많이 한 작품이다. 그래서 호평을 받았다. 모차르트 음악을 틀어놓고 디자인 작업을 하며, 음악의 리듬을 색감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시대극 의상은 자수가 많이 들어가는데, 커튼지를 많이 활용해 비용을 줄였다. 왼쪽부터 살리에르(이호재), 모차르트(김준호), 모차르트 부인 콘스탄체(장지아). 국립극단 제공
그는 2011년 ‘아마데우스’의 의상을 맡았을 때 어느 기자가 ‘고증을 잘한다는 디자이너 이수원’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읽고 ‘누군가는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연출들이 “이수원과 일하고 싶다”라고 해야 한다는 것.
그는 2005년에 무대이야기(Stagetalk)라는 1인기업을 만들었다.
“미국에는 디자이너를 소개해주는 에이전시가 있다. 그런데 한국은 연출들이 개인 연줄에 따라 알음알음 일거리를 준다. 그게 아쉬웠다. 내가 만든 1인기업은 의상, 조명, 무대, 스태프 등 디자이너 20명을 섭외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연결해주는 회사다. 10년 정도 했지만 한국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언젠가는 필요하겠지만 너무 빨랐다. 디자인만 하더라도 디자인료가 제작비에 포함돼 있어 별도로 따기가 어렵고, 제작비 자체도 적다. 회사가 적자여서 많이 지쳤다. 미국에는 ‘유니온’(조합)이라는 게 있어 배우도, 디자이너도 뭉쳐서 협상을 하고 작업환경도 개선한다. 한국에서도 디자이너들이 모이면 되는 데 그게 안 된다. 아무래도 받는 돈을 오픈하기가 힘든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도 의상디자이너가 투자하는 시간은 꽤나 길다. 보통 한 작품을 하는데 2주 이상, 아침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매달려야 한다. 그에 비해 받는 돈은 매우 적다고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먹고 살 만한가’라고 물어봤다. 직업에 대한 리스펙트는 있는데, 삶에 대한 리스펙트는 떨어진다고 했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은 있는데 인간다운 생활을 하긴 힘들다는 뜻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인간다운 생활’은 단지 경제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경제문제보다 작업환경에 더 숨이 막혔다.
“서울의 끊이지 않는 소음과 불빛,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삶,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였다. 뭔가 터닝포인트가 절실했다. 집은 서래마을, 사무실은 효창공원 쪽에 있었는데 연극 끝나고 철수하듯 4년 전 결혼과 동시에 양평으로 작업실과 집을 모두 옮겼다. 결심한지 두 달 만이다. 삶의 터전을 바꾸니 꽃이 어떻게 피는지, 곡식이 어떻게 자라는지,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 수 있어 행복하다. 6개월 전엔 내 생애 최고의 작품인 아들도 생겼다. 출산하느라 1년간 쉬었던 작업도 다시 시작하니 그 또한 새롭고 즐겁다.”
가족 얘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남편 이주환 씨(37)는 6살 연하다. 앞서 그가 말했듯 그의 첫 작품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의 무대설치를 하러 왔다가 만났다. 남편은 그 때 연극배우였고, 그 이후에는 배우와 영화 스태프 쪽 일을 하면서 지금은 건축일도 배우고 있다. 남편은 아직 배우에 미련이 많다. 이수원은 그런 상황이 안 되는 게 못내 안타깝다.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의 에피소드도 하나. 인터뷰 요청 전화를 받을 때 어머니가 옆에 계셨는데 어머니 왈, “잘못 걸려온 전화 아니냐?” 의상디자이너를 누가 인터뷰하겠느냐는 뜻이었기에 “자존심이 상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지”라며, 자괴심이 들었다는 것.
그렇지만 그는 경제문제와 관련해 다른 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언론은 자주 연극은 가난하다고 쓴다. 가난한 배우, 가난한 스태프들에 대한 기사도 많다. 나는 연극이 가난하다는 사실이 흥미위주로 이용되는 것이 매우 불편한 사람 중 한명이다. 예술인들이 가난하다는 것은 연극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예술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연극은 이 시대에 잊혀져 가고 있는 사람의 향기와 진심, 신뢰와 열정이 남아있는 풍요로운 작업장이다. 그 풍요로움을 한번 맛보면 어느 직업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직업이다. 나는 연극은 가난한 예술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듣기 싫은지 모르겠다.”
‘즐거운 복희’의 한 장면. 복희(전수지)는 연인이 호수에 빠져 죽자 그의 죽음을 이용해 손님을 끌어들이려는 펜션분양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촛불로 펜션에 불을 지를까 말까 갈등한다. 촛불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복희의 옷으로 재현함으로써 그녀의 원망을 시각화했다. 이 옷도 농담(濃淡)을 주기 위해 염색을 했다. 극단 백수광부 제공.
그가 지금껏 한 작업을 보니 의외로 무대디자인과 행사디자인도 많다. 대부분 삼성 계열 회사들이다.
“대학생 시절, 제일기획에서 인턴을 했던 게 인연이다. 고마워서 그 이후에도 카드를 보내거나 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인연을 이어왔다. 그 덕분에 귀국하자마자 용인 에버랜드의 공연의상 디자이너로 취직을 한 적도 있다(예술가가 아니라 직원으로 일하는 게 답답해서 6개월 만에 그만뒀다). 그것도 그거지만 무대행사에도 콘셉트를 도입한 게 다른 디자이너들과 다른 점이어서 그 후에도 많이 불러준 것 같다.”
기업의 무대행사에 콘셉트를 도입한 것은 제일기획에서 인턴을 할 때 이도훈 국장(지금은 마스터)에게서 배운 가장 큰 재산이다. 이 국장은 행사는 화려하고 볼거리만 많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콘셉트, 메시지, 키워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를 실천해서 성공한 ‘이벤트의 마술사’다. 이수원은 여기에 의상디자이너의 경험을 더했다. 보통의 무대는 합판에 그림을 그려 만드는데 그는 원단을 창의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일까. 대접도 시원찮고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첫 영감과 첫 콘셉트를 찾고, 그 느낌을 구현하기 위해 리서치를 시작하는 단계가 가장 매력적이다. 즉 극과 캐릭터에 대해 나만의 영감을 표현해 줄 수 있는 자료나 이미지를 찾는 작업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 순간의 느낌이 작품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준다. 윌라 김의 말처럼 리서치에서 어떤 영감을 받느냐에 따라 엄청난 모험을 할지, 편한 여행을 할지가 결정된다.”
그가 늘 ‘엄청난 모험’을 해서 관객들이 ‘편한 여행’을 하도록 도와주길 기대한다.
(이수원 의상디자이너가 참여한 연극 작품은 다음과 같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봄날’ ‘야메의사’ ‘오늘이’ ‘미친극’ ‘리어왕’ ‘청춘예찬’ ‘햄릿’ ‘아마데우스’ ‘언니들’ ‘그을린 사랑’ ‘삼국유사 프로젝트-나의 처용은 밤이면 양들을 사러 마켓에 간다’ ‘임차인’ ‘세자매’ ‘검은 옷의 수도사’ ‘즐거운 ’ ‘숲귀신’ ‘잉여인간 이바노프’ ‘벚꽃동산’ 등)
심규선 기자
심규선 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