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탁금지법 시행 6개월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공익신고학원 강의실에서 수강생 3명이 수업을 듣고 있다. 청탁금지법 시행 초기엔 수강생들로 강의실이 꽉 찼지만 지난해 11월 이후 급격히 줄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13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S공익신고학원에서 문성옥 대표(71)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업 시간이 다 됐지만 강의실에 모인 수강생은 고작 3명. 3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수업에선 란파라치와 관련된 ‘비법’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날 처음 수업을 들으러 왔다는 류모 씨(56)는 “나는 청탁금지법 관련 수업을 들으러 온 게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예전에 뉴스에 자주 나오긴 했던 것 같은데 식당에서 밥 먹는 사람 쫓아다니고 하면서 적발하는 일이 여간 어려워 보이지 않더라”고 말했다.
란파라치 특수를 누리던 이 학원은 지난해 11월 전문 양성반을 없앴다. 일주일에 네 번 열리는 수업은 모두 란파라치와 무관한 일반 공익 신고 관련 강의다. 청탁금지법이 헌법재판소에서 합헌으로 통과됐던 지난해 7월 28일 이후 많게는 50명이 넘었던 학원 수강생은 현재 10분의 1가량으로 줄어든 상태. 30개가 넘는 의자가 모자라 접이식 간이의자까지 동원했던 당시 분위기와는 천양지차였다.
실종된 란파라치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 시행 6개월째. 란파라치는 씨가 말랐다. 시행 초기 청탁금지법 위반 신고가 남발할 것이라는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가장 큰 원인으로 신고 자체의 어려움을 꼽았다. 법 시행 초기 법원은 “무고와 신고 남발을 막기 위해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충분치 않으면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운 바 있다. 문 대표는 “공익 신고의 경우 예를 들어 장애인 전용 주차 구간에 비장애인 차량이 세워진 걸 찍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청탁금지법 신고를 하려면 신고 대상자의 신원을 파악하고 영수증 등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물증’까지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증거를 수집하기까지 위험 부담 또한 상당하다. 몰래카메라나 도청장치를 설치하면 통신비밀보호법, 영수증 재발급을 시도하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를 받을 수 있다.
노력 대비 수입도 보잘것없다. 신고를 통해 부과되는 과태료나 벌금 액수가 대부분 크지 않기 때문에 보상금도 짭짤하지 않다. 시행 초기엔 청탁금지법 위반 신고를 할 경우 최대 2억 원의 포상금과 30억 원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얘기다. 청탁금지법 위반 신고에 의한 포상금 지급 규정도 따로 마련돼 있지 않다. 임창오 한국신고포상자양성협회장은 “5만 원짜리 떡을 선물한 사람을 신고해봤자 과태료로 부과되는 건 20만 원 정도다. 챙길 수 있는 보상금 또한 크지 않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9월 28일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지난달 10일까지 접수된 위반 신고 2311건 가운데 수사를 의뢰했거나 과태료 부과 요청을 법원에 통보를 한 사례는 총 57건(2.5%)에 불과했다. 신고자가 보상을 받은 사례는 0건. 한 경찰 관계자는 “서면과 증거 제출이 원칙이다 보니 수사 의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 경찰서는 관련 신고가 한 건도 접수되지 않아 청탁금지법이 있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라고 말했다.
여전히 울상 짓는 업계
하지만 요식업계나 회원제 골프장, 대학가 등은 청탁금지법 이후 달라진 분위기 때문에 여전히 울상이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인근에서 한정식당을 운영하는 김모 씨(60·여)는 “예전엔 5만∼7만 원어치를 주문했던 손님들이 지금은 3만 원대로 가격을 맞춰 주문하거나 점심에 2만8000원짜리 ‘영란세트’를 시켜 먹는다”고 말했다. 인근 일식집 직원 이모 씨도 “청탁금지법 시행 후 저녁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다. 다들 3만 원 이하 음식만 찾는다”고 말했다.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 등 기념일마다 특수를 누렸던 제과점들도 속이 탄다. 서울 종로구의 한 유명 제과점 직원은 “보통 기념일에는 케이크와 와인 등 30만∼40만 원어치씩 사갔는데 요즘엔 대부분 3만 원 밑으로 맞춰서 구입한다”고 전했다.
제대로 효과 얻으려면 보완책 절실
대학가는 전보다 더 팍팍해졌다. 재수강을 위해 학점을 내려달라고 요청하거나 조기 취업자가 출석 등에 편의를 봐달라고 말하면 청탁금지법에 위반된다. 지난해 11월 취업한 원모 씨(27)는 “회사에서 공문을 보냈는데도 교수님이 과제와 시험 등을 원칙대로 하도록 해 말 그대로 주경야독을 했다”고 말했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확실히 종강파티 같은 회식 자리도 많이 사라졌다”며 “학생들과의 자연스러운 교류가 어려워져 아쉽다”고 전했다.
청탁금지법이 안정적으로 정착되려면 보완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부정 청탁을 없애자는 법의 취지는 좋지만 법에 적용되는 대상이 지나치게 많고 세세하다”며 “‘3·5·10’ 규정(식사 3만 원, 선물 5만 원, 경조사비 10만 원)을 상향 조정하는 것을 떠나 공익에 관련된 사람이 누구인지에 초점을 맞춰 규제를 강화하는 식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지연 lima@donga.com·김예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