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영화 ‘도둑들’ 속 진양상가아파트
영화 ‘도둑들’의 와이어 추격전(위쪽 사진). 서울 중구 충무로의 진양상가아파트(아래쪽 사진) 외벽을 이용해 촬영됐다. 영화 ‘도둑들’ 캡처·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1968년 완공된 높이 17층, 연면적 5만4608m²의 이 쉰 살짜리 주상복합건물의 역사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일제강점기 때 이 땅은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공습에 의한 화재로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비워둔 지대)였다. 광복 후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섰다. 1966년 부임한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는 게 말이 안 된다”며 판자촌을 철거했다. 이후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를 바탕으로 종묘에서 충무로까지 남북으로 길이 1.1km, 너비 1만6278m²의 대지에 8개의 건물(현재 7개)로 구성된 주상복합타운 세운상가를 조성했다. 287채의 진양상가아파트는 이 세운상가군(群)의 남쪽 종점이다.
시작은 화려했다. 국내 최초로 주상복합 구조에 엘리베이터와 양변기, 중앙난방 시스템이 설치된 고급 아파트였다. 전택이, 노경희 부부 등 영화배우나 고위 관료 등이 초기 입주자였다. 옥상에는 헬기 이착륙장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영광은 길지 않았다.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위압감과 설계 변경 등으로 엉망이 된 동선 때문에 얼마 뒤 흉물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1976년 서울시는 “주상복합 용도의 건축물을 더 이상 허가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히기에 이른다. 10년도 안 돼 ‘잘못된 선례’로 전락한 것이다.
아파트 시설 자체는 낡았지만 그래도 깔끔한 편이다. 빈집도 거의 없다. 김태형 관리소장은 “주민 중 70대 이상 고령층의 비중이 크고 근처 상가에서 장사하는 분들도 많다”며 “시설이 낡아 불편함도 있지만 수십 년째 이곳에 살고 있는 이들이 꽤 된다”고 말했다. 1∼4층 저층부 상가는 한때 국내 최대 꽃·혼수상가였던 화려한 기억을 간직한 채 지금은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다. 입장료 2000원의 ‘콜라텍’이 성업하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물론 이 건물도 헐릴 뻔했다. 2007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은 세운상가군 건물을 모두 철거해 공원화하고 주변 지역을 전면 재개발하는 계획을 세웠다. 8개 건물 중 가장 높았던 현대상가는 이때 철거됐다. 하지만 이듬해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로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사업이 중단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세운상가를 보전한 채 문화와 창업의 요람으로 삼는다는 ‘재생 정책’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 덕분에 진양상가아파트도 계속 자리를 지키게 됐다.
하지만 앞으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진양상가아파트를 보기는 어려워졌다. 입주자들이 “별 도움이 안 된다”며 촬영 협조를 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한 것이다. 영화 도둑들이 마지막 작품인 셈이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