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이진]이회창 “박근혜 전 대통령 엎드려 사과했다면 보수 궤멸하진 않았을 것”

입력 | 2017-04-17 03:00:00

이회창 前 자유선진당 총재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는 문재인, 안철수 후보의 ‘사드 말 바꾸기’를 비난할 때는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언성을 높였다. 사드처럼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입장을 뒤집는 후보들을 보수 유권자들이 준별해야 한다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이진 논설위원

《 언론 노출을 꺼리던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가 입을 열었다. 19대 대통령 선거가 전례 없을 정도로 보수 진영에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 구도로 전개되자 보수의 재생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현재 보수를 대변하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와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에 머물고 있다(14일 한국갤럽 조사 기준). 이변이 없는 한 보수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보수의 버팀목’인 이 전 총재는 13일 이럴수록 보수의 존재 이유를 숙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로서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나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것 같다. 누가 될 것 같은가.

“지금은 두 후보가 양자 대결 구도를 이루지만 사실 어떻게 될지 모른다. 두 후보 중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내가 말한다면 보수 진영은 낙담하고 실망에 빠질 것이다.”

死票심리, 보수의 패배주의

―여론조사를 보면 상당수 보수 유권자들까지 마음을 돌린 듯한데….

“사표(死票)를 만들어선 안 된다는 심리가 있다. 그러나 이는 보수 유권자들의 전형적인 패배주의다. 이념의 시대가 갔고, 좌우 이념은 낡은 진영 논리라고 말하지만 지금도 밑바닥에는 좌우 정치의 오랜 대립과 경쟁의 논리가 깔려 있다. 이념은 근본적인 문제다. 보수는 좀 멀리 내다봐야 한다. 정권을 빼앗겨도 단 5년간이다. 보수가 살아남아 건전한 견제 정당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확실한 보수적 가치와 신념을 가진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보수 후보에게 던지는 표는 사표가 아니라 생표(生票)다.”

―보수 유권자도 덜 나쁜 후보, 즉 차악(次惡)을 찍겠다는 심리도 있지 않나.


“그런 심리는 보수가 생즉사(生則死), 즉 살려고 하다 결국 죽는 것이다. 심지어 보수 정당 안에서도 국민의당과의 연대를 말하고 있는데 정치인들조차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문 후보와 안 후보는 차이가 없다. 안 후보가 보수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국가 지도자는 정치적으로 어떤 이념을 품고 있고 어떻게 행동해 왔으며 기반은 무엇인가를 놓고 판단해야 한다.”

―안 후보는 ‘안보는 보수’라고 하지 않았나.


“처음엔 안철수의 새 정치를 아주 주의 깊게 보고 감명받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새 정치는 무산되고 말았다. 현재만 놓고 봐도 안 후보의 국민의당은 그 기반이 박지원 대표를 비롯한 과거 민주당 세력이다. 이 세력은 ‘김대중 정신’을 이어받은, 쉽게 말하면 햇볕정책이라는 아주 잘못된 남북관계를 설정하고 그것을 금과옥조로 신봉하는 정당이다. 그렇다면 안 후보가 국민의당을 장악하고 여러 가지 대북관계를 바꿔나갈 수 있겠나?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잣대는 뭔가.


“대북관계가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를 확연히 구별하는 제1의 기준이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가 기본 가치다. 그 기초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유가 확고하게 있다. 북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짓밟는 수령 독재체제다. 남북의 체제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다만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평화 공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대북정책에는 반드시 하나의 필요적 명제가 있다. 포용하고 공존하되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원은 하지만 북한의 개혁·개방과 연계하는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무조건적 지원을 해온 햇볕정책은 정말 폐기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 공식적으로 북한에 건넨 돈만 8조 원이 넘는다. 이 돈으로 핵무기를 제조할 토대와 골격이 만들어졌고 지금 김정은의 ‘핵 장난’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햇볕정책을 신봉하는 세력이나 정당을 국민이 분명하게 알고 판단했으면 한다.”

―과거 대세론의 당사자로서 ‘문재인 대세론’을 어떻게 보나.

“나는 불안하게 봤다. 얼마 전까지 혼자 지지율이 높았지만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오니까 금방 내려앉았고 안철수 후보가 자강론을 내세워 밀고 나가니까 또 흔들렸다. 그래서 대세론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문 후보는 유력 후보다.


“문 후보가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본 원칙이 아주 불안하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기각하면 다음은 혁명밖에 없다고 말했다. 혁명이라는 것은 현재의 지배구조와 사회구조, 정치구조를 완전히 뒤엎고 지배 엘리트층을 모두 바꾸는 것이다. 대선에 나오는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더구나 법을 배웠다는 사람이….”

文·安‘사드 말 바꾸기’ 변검 보는 듯

이 전 총재는 자칫 후보들에 대한 평가가 될 수 있고 폄훼가 될 수도 있다며 조심스러워했지만 일단 말문이 열리자 마음속에 담아뒀던 말을 남김없이 쏟아냈다. 특히 두 후보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 안보 문제와 관련해 말을 바꾸는 것을 가리켜 “순식간에 얼굴 가면을 바꾸는 중국 전통극인 변검(變瞼)을 보는 것 같다”며 “이런 후보들을 어떻게 믿고 앞으로 5년간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운명을 맡기겠느냐”고 비판했다.

―보수 후보들의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나도 답답하다. 바른정당이 탄생한 경위나 서로 맞설 수밖에 없던 사정을 보면 자유한국당과 손잡는 것은 어렵다. 이제 와서 두 당이 합쳐봤자 지지율 상승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지지율이 오르려면 아주 큰 지각변동을 가져오는 극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두 후보가 끝장토론을 해보면 좋겠다. 서로 치열하게 보수의 위치와 가야 할 길, 신념, 이런 것을 놓고 속을 털어놓으면 단일화든 뭐든 화두가 나올 수 있지 않겠나.”

―보수진영이 지리멸렬해진 원인은 뭐라고 보나.

“박 전 대통령이 가장 큰 원인이고 책임이 있다. 나도 박 전 대통령 본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돈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최순실 일당을 끌어들여 국정을 수행하고 세금이 들어가는 사업을 농단하게 한 점이다. 국민을 화나게 하고 좌절시키고 실망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40% 안팎의 중도층이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수를 더할 수 없는 위기에 빠지게 한 배경이다.”

―이 전 총재 본인이 2012년 대선 때 박 전 대통령을 돕지 않았나.


“지난 대선에서 박 전 대통령을 위해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2002년 대선 때 박 전 대통령이 독감에 걸린 상태에서도 나를 위해 충청 지역을 맡아 유세를 도와주었다. 그걸 기억해 지원을 요청받았을 때 흔쾌히 도왔다. 다행히 당선됐는데 이후 국정을 수행하는 방식을 보고 실망했고 기대를 접었다.”

―박 전 대통령의 파면을 본 소회는….

“국민에게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 시켜 달라고 적극적으로 다닌 일이 부끄럽고 자괴심을 크게 느꼈다. 박 전 대통령의 실체를 몰랐던 탓이다. 국민께 드릴 말씀이 없고 죄송하다. 박 전 대통령은 국민 앞에 엎드려 사과했어야 했다. 옛 새누리당 지도부도 청와대 앞에 가서 멍석 깔고 직언을 했다면 보수가 지금처럼 궤멸 상태에 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 구속, 잘못된 관행 탓

―박 전 대통령을 구속한 데 대해서는….

“나는 구속에 반대했다. 자유선진당 총재일 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불구속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형사소송에서는 검찰과 피의자가 각기 당사자로 대등하게 다퉈야 한다는 원칙과 불구속의 원칙이 있다. 검찰은 피의자를 구속해 약자로 몰아넣으면 수사에 편리하고 자백을 받아내기 쉽다고 여긴다. 박 전 대통령의 죄는 사법 절차에서 가려지겠지만 수사 단계에서 꼭 구속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구속영장이 기각되면 검찰이 패배한 것이고 발부되면 승리했다고 보는 것도 아주 잘못된 관행이다. 많은 국민이 구속을 못 시키면 검찰이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것도 문제다.”

―이 전 총재는 2002년 대선 때 이른바 ‘3대 의혹 사건’으로 불리는 조작된 검증의 최대 피해자였다. 이번 ‘초(秒)치기 대선’에서 검증이 제대로 될까.

“선거를 몇 차례 치러보니까 네거티브 캠페인은 불가피하다. 네거티브는 예수가 입후보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말한 대로 2002년 대선 때 3대 의혹이다, 5대 의혹이다 하는 걸 겪으면서 이건 네거티브가 아니라 범죄라는 생각을 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조작하는 것은 제재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고발을 해도 사법처리 결과는 선거가 끝난 뒤에나 나온다. 선거 기간 중에 고발해 봐야 소용이 없다. 풀어야 할 숙제다.”

이 전 총재를 괴롭힌 3대 의혹은 △아들 병역비리 은폐 △기양건설 로비자금 수수 △최규선 자금 수수 등이었으나 선거가 끝난 뒤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이 위중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직접 제재할 것처럼 나오는 것 자체는 아주 긍정적으로 본다. 실제로 선제타격을 하고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한미 동맹 간에는 전쟁의 불똥이 튀지 않도록 막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도 동북아시아에서 강자 노릇을 할 것이 아니라 세계 정세를 주도하는 국가라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북한을 완충지대로 삼아 놓아두지 말고 양질의 국가로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북한은 절대 핵무기를 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북핵의 비확산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협상을 하려고 할 때 한국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새 대통령이 가장 시급하게 할 일이 있다면….

“국가와 정부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가 아주 망가졌다. 새 대통령은 국정의 기본 시스템을 빨리 세워야 한다. 지금 한국 대통령은 국제관계에서 완전한 부재 상태다. 새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외국 정상들을 만나면서 대외관계를 복구해야 한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