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권영우 화가 백색화 연작전
한지를 찢는 작업을 하고 있는 생전의 권영우 화가(위)와 1958년 국전 문교부장관상을 받은 ‘바닷가의 환상’. 국제갤러리 제공
화가 권영우(1926∼2013)의 그림은 최근 단색화 열풍과 더불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달 열린 아트바젤 홍콩에서 동시대 재조명되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캐비닛’ 섹터에 ‘권영우 아카이브’전이 소개됐다. 당시 선보인 채색 한지 작품들은 해외 미술계 인사들 사이에서 호응이 컸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 2관 1층에서 열리는 ‘Various Whites’는 권영우 화가의 초기 단색화 작업인 백색화 연작 3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한지를 재료로 다양한 질감을 표현한 작품들은 제목대로 ‘다양한 흰색’이다. 작가가 1970, 80년대에 제작한 백색 한지 작업들로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단색화 초기 작품이어서 희귀하고 수가 많지 않은 만큼 아트바젤 홍콩에서 관심 받았던 채색 한지보다도 가치가 높다는 게 미술관 측 설명이다.
무제(P75-7), 1975년. 패널에 한지, 122×81cm. 권영우 화가가 한지를 이용해 작업한 백색화는 입체적인 표면과 리듬감 있는 다양한 조형성을 추구한 작품이다. 국제갤러리 제공
도구를 이용해 종이를 자르고, 찢고, 뚫고, 붙이는 행위를 통해 작가는 한지의 물성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 찢고 뚫은 한지 뒤에 다른 한지를 겹쳐 붙여 섬세한 질감을 강조했다. 그는 시내 목공소와 철물점을 다니면서, 평평한 한지를 입체적인 조형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도구를 직접 찾고 만들었다. 권영우가 추구한 이 기법은 동양화를 실험적으로 재조명하면서 새로운 문법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그는 서울대 미대 첫 학번(1946년)으로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지만 전통적인 동양화의 틀에 갇혀 있지 않았다. “동양화, 서양화란 구분을 굳이 두지 말자. 그것이 기름물감으로 그렸건, 서양화적인 화법으로 그렸건, 요는 그 작품이 발산하는 어딘가 그 체취가 동양적인 것을 발산할 적에 그것은 동양화다, 저는 그렇게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권영우·생전 인터뷰 중)
그의 삶은 정갈한 한지 작업과 일치했다. 그는 중앙대 교수로 일했지만, 늘 전업 작가로서의 활동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자녀들의 학업 문제가 얼추 해결되자 교수직을 접고 1978년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작품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한국의 아내가 보내 주는 한지로 작업하면서, 가난 속에서도 창작의 희열을 누렸다. 1989년 파리 활동을 마치고 귀국해 작업실을 구했을 때 작가는 화가 동료들이 없는 외딴곳에 자리 잡았다. “오로지 작품 창작에만 몰두하고 싶은 부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는 게 차남 권오현 씨의 설명이다.
전시장에는 초기 작인 채색화 ‘바닷가의 환상’도 나와 있다. 1958년 국전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당시 동양화의 답습을 벗어난 실험적인 작품으로 초현실적인 심상을 나타낸다.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데 쓴 도구, 영상 인터뷰와 함께 아내와 나눈 편지, 사진, 스크랩 기사들도 전시됐다. 작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이다. 30일까지.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