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대해부 <하> ―첫사랑 하면 떠오르는( )는?
꼭 비가 와서만은 아닐 게다. 그곳에 가면 그 소절이 들리면 떠오르는 걸. 그게 그인지, 바라보는 나인지는 모르겠다. 뿌옇다가도 선명해지고 따스했다가 시려지니. 처음이라 맘에 남는 줄 알았더니, 이리 오래 남은 하나인 것을.
장기전세 시프트도 아니면서 좌심방우심실에 똬리를 튼 그 사람. 6∼9일 조사업체 엠브레인을 통해 남녀 1000명에게 ‘첫사랑 하면 떠오르는 ( )는?’을 물어봤다. 이미 울컥한 요원들은 진작 자리를 비웠다. 그래,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영화 한 방이 무지 셌다. 2012년 약 412만 명을 모았던 영화 ‘건축학개론’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컸지만, 배우 수지를 단숨에 ‘국민 첫사랑’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지금껏 이어졌다. 응답자 26.3%가 첫사랑 국내 연예인으로 수지를 꼽았다.
2위 배용준(3.9%)과 큰 격차를 보인 수지는 성별과 세대를 아우르는 1위였다. 50대 이상 여성에서만 배용준(14.4%)이 수지(8.8%)를 앞섰다. 김은영 대중문화평론가는 “수지는 걸그룹 ‘미쓰에이’ 출신임에도 큰 일탈 없이 ‘건축학개론’ 이미지를 잘 유지해왔다”며 “시대적 배경이 1990년대라 위아래 어느 연령대도 받아들이기 편했던 점도 한몫했다”고 설명했다.
‘욘사마’의 저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드라마 ‘겨울연가’가 2002년 작품인 점을 감안하면 15년째 첫사랑 이미지를 이어온 셈이다. 영화 ‘클래식’ 등에서 청초한 매력을 발산했던 손예진은 모든 연령의 남성에게 고루 지지를 얻으며 3위에 올랐다. 4, 5위는 최근 신드롬이 반영됐다. 드라마 ‘도깨비’로 대박을 친 공유와 ‘응답하라 1988’ ‘구르미 그린 달빛’으로 연타석 홈런을 날린 박보검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몰림이 심했던 국내에 비해, 해외 연예인은 경쟁이 치열했다. 3파전 양상을 띠었지만 결국 ‘80년대 책받침 소녀’ 소피 마르소(7.4%)가 1위를 차지했다. 강태규 대중문화평론가는 “피비 케이츠, 브룩 실즈, 다이앤 레인과 함께 지금은 40대 이상 중년이 된 소년들의 사춘기를 지배하던 브로마이드 4대 천왕”이라며 “특히 소피 마르소는 첫사랑 이미지가 강해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고 말했다.
○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 않아.”(황순원 소설 ‘소나기’)
수지보다 압도적인 강자는 따로 있었다. 첫사랑 문학작품으로 1위에 오른 ‘소나기’는 53.6%로 과반수였다. 이번 설문이 보기 없이 ‘오픈형’으로 진행됐단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쏠림이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물론 훌륭한 작품이나 다소 씁쓸한 결과”라며 “콘텐츠의 힘도 강했지만 획일적인 공교육의 영향도 상당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순위를 살펴봐도 김유정의 ‘봄봄’과 ‘동백꽃’,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피천득의 ‘인연’이나 알퐁스 도데의 ‘별’ 등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이 대다수다.
첫사랑 노래는 ‘청년 vs 중장년’ 구도가 확실했다. 40대 이상은 이문세의 ‘옛사랑’, 30대 이하는 버스커버스커의 ‘첫사랑’을 열렬히 응원했다. 1, 2위 차이는 겨우 0.1%포인트였다. 특히 두 뮤지션은 3위(벚꽃 엔딩)와 9위(광화문연가)에도 올라 당대를 대표하는 ‘첫사랑 노래꾼’들임을 증명했다.
드라마는 역대 최고 시청률(65.8%)을 찍었던 ‘첫사랑’이 비교적 손쉽게 1위에 올랐다. 이름 덕도 봤다는 게 중론. ‘영상의 마술사’라 불렸던 윤석호 PD의 ‘겨울연가’와 ‘가을동화’가 2, 3위에 올랐다. 영화는 역시 ‘건축학개론’이 1위를 차지한 가운데, 곽재용 감독 작품이 2편(‘클래식’ ‘엽기적인 그녀’)이나 톱10에 이름을 올렸다.(다음 회에 계속)
정양환 기자 ray@donga.com·유원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