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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기 “가짜 꽃 인생 시든 뒤 진짜 꽃 알게됐죠”

입력 | 2017-04-20 03:00:00

꽃 주제 사진전 연 배우 이광기씨




사진작가로 변신한 배우 이광기 씨. 2009년 아들 석규 군을 떠나보낸 이 씨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이듬해 아이티로 자원봉사를 떠났다가 사진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꽃잎이 지면 꽃이 있던 자리엔 씨를 품은 열매가 자란다. 시든 꽃을 가리켜 “죽은 꽃”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다. 새 생명을 품은 뒤에야 식물의 자궁을 덮고 있던 꽃잎은 공중으로 흩날린다.

배우 이광기 씨(48)는 자신의 삶을 ‘꽃’과 같다고 말했다. 풍성하고 화려히 피었던 날이 있었고 예상치 못한 사고로 시들어 가던 날도 있었다. 지금 그는 새 생명을 뿌리내린 채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그는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달 초 첫 개인전을 열어 자신과 닮은 꽃을 주제로 20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6월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사진 작업의 시작을 내 이야기로부터 하고 싶었어요. 전 제 삶이 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예전엔 화려하고 시들지 않는 가짜 꽃처럼 살았어요. 그게 진짜 내 모습이 아닌데 말이죠. 시들고 나서야 나는 생화였고 이게 자연스러운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1985년 KBS 드라마 ‘해 돋는 언덕’으로 데뷔해 올해로 경력 33년 차를 맞았다. ‘왕과비’, ‘태조왕건’, ‘장희빈’, ‘정도전’ 등 굵직한 사극에 출연해 시대극 전문 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밝은 에너지로 예능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갑자기 카메라를 잡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2010년 아이티 대지진 현장에 자원봉사를 가며 사진과 만났다. 이전엔 ‘똑딱이’ 카메라로 가족사진을 찍는 정도였다. 그는 아이티에서 지진으로 가족과 웃음을 잃은 아이들을 만났다. 이후 그가 베푼 사랑 속에서 아이들의 눈빛이 생기를 찾아가는 과정을 봤다. 이 순간을 시간에 흘려보내기 싫었다. 사진의 기술적인 부분은 부족했지만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을 담았다. 그들의 웃음과 눈물에서 불과 석 달 전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아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는 2009년 11월 신종인플루엔자로 인한 폐렴으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던 아들 석규 군(당시 6세)을 잃었다.

“아이가 하늘나라로 떠나고 그렇게 매일 기도했어요. 아이의 체온을 한 번만 느끼게 해달라고, 천국에 있는 아들 모습 꿈에서라도 한 번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죠. 아이티에서 내 아이와 나이가 같은 꼬마를 안으며 아들의 체온을 다시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토록 보고 싶던 아들이 꿈에 나와 내 눈물을 닦아 줬습니다.”

아이티에 다녀온 뒤 그는 기부행사 기획자로도 변신했다. 2010년 50∼70명의 젊은 작가가 참여하는 자선경매를 기획해 매년 1억∼2억 원을 아이티, 우간다의 학교 짓기 사업에 후원해 왔다. 평소 미술에 관심이 높아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으며 만들어 둔 인맥이 큰 도움이 됐다. 아이티에 지은 학교의 이름은 석규 군의 영어 이름을 따 ‘케빈스쿨’로 지었다.

그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초등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연간 50∼60회의 강연을 하고 있으며 9월 시작하는 DMZ국제다큐영화제의 트레일러 제작을 진행 중이다. 가을엔 그의 본업인 배우로서 사극에 출연할 예정이며 틈이 날 때마다 미술, 연기, 노래를 하는 학생들을 위한 대안학교 건립을 기획 중이다.

“요즘 우리들은 물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데 무언가 성취하고 그 성취를 통해 얻는 만족감은 모두 부족합니다. 전 배우인데 우연한 기회에 덤으로 사진을 하고 작가가 됐잖아요. 새롭게 얻은 일에서 오는 작은 성취가 감사하고 인생도 행복해지더라고요. 이런 가식 없는 기쁨을 여러분도 느껴 봤으면 좋겠습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