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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의 워치콘 X]순다 해협과 풍계리

입력 | 2017-04-22 03:00:00


이철희 논설위원

며칠 전 공개된 두 장의 사진은 북한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15일)을 전후해 휘몰아친 한반도 위기설의 기묘한 현실을 보여줬다. 하나는 태양절 당일 미국 항공모함 칼빈슨 모습이 담긴 해상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하루 뒤 함경북도 풍계리 핵실험장 주변을 찍은 위성사진이다.

미 해군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에서 항모 칼빈슨은 인도네시아 자바 섬과 수마트라 섬 사이의 순다 해협을 유유히 통과하고 있었다. 1주일 전 “무적함대를 보낸다”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말대로라면 한반도 근처에 와 있어야 할 항모가 5000km 떨어진 곳에, 그것도 정반대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핵실험장의 배구경기

풍계리 핵실험 갱도 인근을 찍은 위성사진에는 경비병 막사와 지휘센터 앞 공터 3곳에 나와 있는 북한 사람들이 잡혔다. 북한 전문 웹사이트 ‘38노스’는 6명씩 나뉘어 배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얼마 전까지 ‘장전·거총’ 상태였던 핵실험장인데, 마치 칼빈슨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듯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칼빈슨의 항로를 놓고 고도의 술책이었을 수 있다는 변론도 있지만 가뜩이나 빈말이 많았던 트럼프의 말은 허풍이 됐다. 미국 새 정부의 어설픈 행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위기의 한복판에 방한한 마이크 펜스 부통령 일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로 오는 기내에서 백악관 관계자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와 관련해 “한국의 차기 대통령이 결정할 문제”라고 밝혀 논란을 불렀고, 방한 첫 일정으로 현충원을 방문한 펜스 부통령의 부인은 핑크색 원피스 차림으로 참배해 입방아에 올랐다. 과연 보좌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 3개월이 되도록 사실상 과도정부 상태다. 특히 아시아 정책라인의 주요 자리는 대부분 공석이거나 대행 체제다. 국무부와 국방부 차관·차관보로 추천받은 인사들은 번번이 백악관 반대에 부딪혀 낙마했다. 지난 대선 때 ‘트럼프는 안 돼(Never Trump)’에 가담해 블랙리스트에 오른 전문가들이라는 이유에서다. 여기에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까지 전격 경질되면서 국가안보회의(NSC)마저 물갈이 인사가 진행되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미국이 대북정책 재검토를 마무리하고 ‘최고의 압박과 개입’ 원칙을 세웠다는 소식에도 전문가들 사이에선 “누가 끝냈다는 소리냐”는 얘기가 나온다. ‘햄버거 협상’부터 ‘전투용 망치’까지 모든 가능성을 고려한다는 것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에 불과하지 않으냐는 비아냥거림까지 들린다.

칼빈슨 이번엔 진짜 온다

가장 신난 건 김정은일지 모른다. 북한의 벼랑 끝 도발은 늘 미국을 향한 관심 끌기 수단이었다. 더욱이 한국은 리더십 부재 상태이고 미국 초짜 행정부는 좌충우돌인 지금은 어느 때보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동안 미국의 대외정책 순위에서 늘 뒷전이던 북핵은 일약 최우선 의제로 올랐으니 절반은 성공한 셈일까.

북한은 보란 듯 풍계리의 배구경기 모습을 위성에 노출시켰다(상업 위성은 궤도 이동 시간표가 인터넷에 공개된다). 북한은 앞으로 도발 수위를 계속 끌어올릴 것이다. 핵실험은 잠시 연기됐을 뿐이다. 당장 25일은 인민군 창건일이다. 그때쯤 칼빈슨은 한반도에 진짜 도착한다고 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