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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카페]국민연금의 지나친 몸사리기

입력 | 2017-04-25 03:00:00


이건혁·경제부

16일 심야 회의 끝에 대우조선해양 채무조정안에 찬성표를 던진 국민연금관리공단이 후유증을 앓고 있다. 최근 대우조선 채무조정안 관련 실무를 담당한 안태은 채권운용실장이 사의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공단 측은 안 실장의 사의에 대해 “건강상의 이유”라고 설명했지만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대우조선 회사채 투자 책임설’ ‘찬성 불만설’ 등의 해석이 나온다. 2012년부터 채권운용실장을 맡아온 간부의 갑작스러운 사퇴는 이번 일의 뒷수습이 간단치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국민연금은 막판 ‘벼랑 끝’ 협상을 통해 KDB산업은행과 대우조선으로부터 더 좋은 조건을 받아냈다. 하지만 지나치게 책임을 의식해 몸을 사리면서 금융시장과 구조조정 시스템의 불확실성을 키웠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다른 기관투자가들도 막판까지 고민을 거듭하는 국민연금의 눈치를 보느라 채무조정안 찬반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고, 사채권자 집회가 열리는 17일 오전에서야 부랴부랴 회의를 열 수 있었다. 대우조선 회사채를 보유한 자산운용사의 고위관계자는 “국민연금과 산업은행의 벼랑 끝 협상과 말 바꾸기에 다른 투자자들은 주말 내내 마음을 졸여야 했다”고 말했다.

금융투자업계는 국민연금의 의사 결정 시스템이 ‘최순실 트라우마’로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15년 7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한 뒤 특검 수사가 진행됐고, 관련자들은 줄줄이 기소됐다. 수익성, 공공성보다 여론의 향방과 ‘향후 문제 제기가 없는 결정’이 가장 중요한 의사 결정 원칙이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투자는 손실을 볼 수도, 이익을 볼 수도 있다. 투자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연금이 독립적이고 투명한 의사 결정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순실 트라우마’를 극복할 전문성도 부족하다. 24일 국민연금에 따르면 대우조선 채무조정안 찬반 결정을 위한 투자위원회가 열린 17일 핵심 책임자인 실장급 8자리 중 2자리가 공석이었다. 기금운용본부의 전북 전주 이전에 따른 인력 이탈의 후유증이다. 이에 따라 국민 노후자금 운용에 공백이 생겼지만, 국민연금은 이들을 대체할 전문가를 아직도 찾지 못했다.

국민연금의 진짜 문제는 앞으로 있을 일들이다. 국민연금의 운용자산은 현재 561조 원,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상장사만 280개에 이른다. 운용자산이 불어날수록 국민연금의 의사결정 권한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이 몸을 사리고 책임 있는 투자를 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국민의 노후자금과 국가 경제의 손실로 돌아올 것이다.

이건혁 기자 g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