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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전문기자의 맨 투 맨]적폐 블랙리스트

입력 | 2017-04-26 03:00:00


진보정권이 들어서도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질까? 동아일보DB

이형삼 전문기자

최근 한 진보성향 매체는 언론인 A 씨가 법조 출입기자 시절부터 우병우 전 대통령민정수석과 ‘사적인 친분’을 맺었고 우 전 수석을 ‘띄워주는 기사’도 실었다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 중 ‘강직한 성격과 저돌적인 수사력을 높이 평가한 임채진 전 검찰총장은…우 수석을 대검 중앙수사부 과장으로…인사를 감행했다’는 대목을 근거로 들었다. A 씨는 혀를 찼다.

“2015년 1월 우 전 수석 임명 직후 검찰 안팎의 다양한 시각을 전한 기사였다. ‘과도하게 앞뒤 안 가리는 수사’ ‘너무 직선적이고 배려심이 없다’ 같은 부정적인 내용도 있는데 딱 그 대목만 인용했다. 당시는 우 전 수석 관련 의혹이 불거지기 전인 데다 나는 그와 일면식도 없고 법조를 출입한 적도 없다. 이런 식으로 ‘적폐 언론’ 블랙리스트를 만들 건가.”

고위공무원 B 씨는 진보정권 출범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인간적 갈등’이 크다고 털어놨다.

“박근혜 정부 땐 개성공단 폐쇄의 당위성을 설득한다고 뛰어다녔는데, 다음 정부에선 같은 입으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의 필요성을 홍보해야 할 판이다. 지난 몇 년간 북한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해온 내가 보기엔 유엔 제재와 맞물리면서 이제야 개성공단 폐쇄 효과가 나타나는 듯한데, 그런 내 소신을 고집하면 부처 내부에서부터 흔들어대지 않겠나.”

보건복지부 직원 C 씨는 “그간 전면에 내세웠던 보건·의료 부문 대신 복지·인구 부문을 간판으로 내걸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며 “잔뜩 벌여놓은 보건·의료 사업들을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이라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박근혜 정부는 ‘바이오헬스 7대 강국’을 목표로 제약, 의료기기, 화장품 투자를 확대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대리처방, 성형시술 의혹이 드러나고 진보성향 대선 후보들이 사회서비스, 저출산대책 등을 강조하면서 보건·의료는 도매금으로 찬밥 신세가 될 처지다. 의료·정보통신기술(ICT)·생명공학기술(BT) 융합사업처럼 정치논리를 떠나 긴 안목으로 추진할 일도 뒤로 밀려날 공산이 크다.

대기업들이 박근혜 정부의 역점 사업인 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발을 빼려 한다는 건 이미 구문(舊聞)이다. 중소·신생기업과 벤처 생태계를 공유하는 ICT 등 일부 업종 외엔 가뜩이나 귀찮은 ‘재능기부’쯤으로 여기던 차였다. 대기업 임원 D 씨는 “우선 ‘창조경제’라는 이름부터 바꾸고 눈치껏 출구전략을 찾을 요량”이라고 했다. 대기업이 손을 떼면 전국의 창조경제혁신센터는 단순 임대공간으로 전락하기 쉽다. 대기업의 기술, 관리, 마케팅 지원을 받으며 창조경제 콘셉트에 맞게 조직과 투자를 정비해온 중소기업들엔 날벼락이다. D 씨는 “가능성이 보여도 당장 실적이 없으면 미운털 박히기 전에 접는 게 낫다”며 “영화 ‘광해’와 ‘변호인’ 때문에 박근혜 정부에 찍힌 CJ가 뒤늦게 ‘명량’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으로 우파에 어필하려 했지만 탄압을 못 피했다”는 예를 들었다(이에 대해 CJ 관계자는 “영화 투자는 개봉하기 수년 전에 결정되기에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A, B, C, D 씨가 우려하는 상황이 정말 현실이 될까. ‘적폐 청산’ 구호도 없앴다는데 이들이 너무 민감하게 예단하는 건 아닐까. 청와대와 정치권, 공무원 사회를 두루 경험한 E 씨의 전망을 들어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문재인도 안철수도 119석, 39석으로는 국회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정치는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안보, 외교가 눈앞의 현안이지만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장기판에서 차기 정부의 역할은 미미하다. 이런 마당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놓고 좌향좌 스탠스를 취하면 태극기부대가 거리로 뛰쳐나온다. 경제?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가 나올 수 없거니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이슈라도 터지면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대통령을 탄핵해 감옥으로 보낸 국민이다. 새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수준이 비현실적으로 높다. 올해가 다 가도록 뭔가를 못 보여주면 지지율이 곤두박질쳐 국정 운영은 늪에 빠진다. 극적 효과로 상황 반전을 꾀할 여지가 커진다. 사정(司正), 이전 정권 실정(失政) 들추기, 재벌 때리기가 그것이다. ‘적폐 마녀사냥’으로 확산될 수 있다. 집권 6개월쯤이면 검찰과 국가정보원에서 온갖 사정 정보가 올라올 테니 타이밍도 맞다. ‘문고리 3인방’ 중 이재만과 안봉근을 제대로 털지 않은 건 그런 용도로 아껴둔 게 아닐까. 이재용이 대표로 짊어져서 이 정도로 끝났지만 재벌 카드도 언제든 다시 꺼내들 수 있다.”

물론, E 씨의 극히 개인적인 견해다.
 
이형삼 전문기자 han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