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 논설위원
후보 토론 수준 실망스럽지만
안 후보의 결정적 한 장면은 “내가 MB의 아바타냐”라고 문 후보에게 집요하게 캐물었던 대목이다. 문 캠프의 네거티브를 비판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결과는 엄마 앞에서 형의 잘못을 인정받으려는 아이 같았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정치인의 자산이지만 분노와 화풀이는 다르다. 그제 4차 토론에서 많이 만회하긴 했지만 안철수는 정말로 문재인에게 화가 나서 정치하는 것 같았다.
미디어 선거인 현대 선거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과 반비례해 TV토론의 영향력은 줄고 있다. 미디어 전문가들에 따르면 TV토론은 유권자가 지지 후보를 통해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걸 확인하는 차원이므로 토론을 보고 지지 후보를 바꾸는 일은 드물다. TV토론 결과대로라면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이겼을 리 없다.
2012년 대선토론에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에게 시쳇말로 탈탈 털린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이정희가 사퇴했음에도 선관위 주최 3차 토론에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박 후보의 생각이 너무 확고해 조윤선 대변인이 당사에서 ‘토론 거부’에 관한 기자회견문을 쓰고 있었다. 문고리 3인방의 호소도 안 먹히는 상황에서 7인회 원로그룹의 설득으로 겨우 마음을 바꿔 먹은 박 후보가 삼성동 자택을 나와 방송국에 도착한 시간이 토론 직전이었다. 박 후보가 토론을 망친 건 당연지사. 그런데도 당선됐다. 사람들의 확증편향은 얼마나 무서운가.
TV토론은 말하기 경연장이 아니다. 말을 잘하면 좋긴 하겠지만 말을 잘한다고 유리하지 않다. 토크쇼의 제왕 래리 킹의 말을 빌리자면 솔직함과 진실한 태도야말로 유일한 기술이다. 킹은 말더듬이도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고 한다. “나, 나, 나는 말, 말, 말을 더듬어요.” 그 순간 시청자는 모든 걸 이해한다. 다행히 성능 좋은 카메라가 출연자의 얼굴에 떠오른 미묘한 감정변화와 몸짓 등 모든 디테일을 잡아낸다.
자질·품성 시청자는 다 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