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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의 사회탐구]TV토론이 대선 승자다

입력 | 2017-04-27 03:00:00


정성희 논설위원

네 차례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가장 인상적 장면을 꼽으라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전인권 적폐 가수’ 공격에 대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생각을 물었던 순간이다. 문 후보는 “제가 한 것은 아니지 않으냐”라며 “정치적 입장을 달리한다고 해서 그런 식의 폭력적이고 모욕적인 문자폭탄을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드렸다”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건 그 다음이었다. 안 후보가 “왜 예전에는 문자폭탄이나 막말 같은 것을 양념이라고 했느냐”는 추가 질문을 하는 사이 문 후보는 “홍준표 후보에게 질문하겠다”며 몸을 싹 돌려버렸다. 나는 눈앞에서 문이 쾅 닫히는 느낌이었다.

후보 토론 수준 실망스럽지만

안 후보의 결정적 한 장면은 “내가 MB의 아바타냐”라고 문 후보에게 집요하게 캐물었던 대목이다. 문 캠프의 네거티브를 비판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결과는 엄마 앞에서 형의 잘못을 인정받으려는 아이 같았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정치인의 자산이지만 분노와 화풀이는 다르다. 그제 4차 토론에서 많이 만회하긴 했지만 안철수는 정말로 문재인에게 화가 나서 정치하는 것 같았다.

처음 두 차례 토론에서 존재감을 보였던 심상정 후보는 세 번째 토론에서 문 후보가 유승민 후보에게 답변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끼어들어 토론의 맥락을 끊어 버렸고 네 번째 토론에서는 매너가 너무 거칠었다. 심 후보는 문재인을 공격한 적도, 방어해준 적도 없다고 해명했지만 시청자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것이다. 방송 PD들은 알고 있는 금언이지만 ‘시청자는 무조건 옳다.’


미디어 선거인 현대 선거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과 반비례해 TV토론의 영향력은 줄고 있다. 미디어 전문가들에 따르면 TV토론은 유권자가 지지 후보를 통해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걸 확인하는 차원이므로 토론을 보고 지지 후보를 바꾸는 일은 드물다. TV토론 결과대로라면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이겼을 리 없다.

2012년 대선토론에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에게 시쳇말로 탈탈 털린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이정희가 사퇴했음에도 선관위 주최 3차 토론에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박 후보의 생각이 너무 확고해 조윤선 대변인이 당사에서 ‘토론 거부’에 관한 기자회견문을 쓰고 있었다. 문고리 3인방의 호소도 안 먹히는 상황에서 7인회 원로그룹의 설득으로 겨우 마음을 바꿔 먹은 박 후보가 삼성동 자택을 나와 방송국에 도착한 시간이 토론 직전이었다. 박 후보가 토론을 망친 건 당연지사. 그런데도 당선됐다. 사람들의 확증편향은 얼마나 무서운가.

TV토론은 말하기 경연장이 아니다. 말을 잘하면 좋긴 하겠지만 말을 잘한다고 유리하지 않다. 토크쇼의 제왕 래리 킹의 말을 빌리자면 솔직함과 진실한 태도야말로 유일한 기술이다. 킹은 말더듬이도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고 한다. “나, 나, 나는 말, 말, 말을 더듬어요.” 그 순간 시청자는 모든 걸 이해한다. 다행히 성능 좋은 카메라가 출연자의 얼굴에 떠오른 미묘한 감정변화와 몸짓 등 모든 디테일을 잡아낸다.

자질·품성 시청자는 다 안다

TV토론이 거듭되면서 “이런 수준 낮은 토론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TV토론 무용론이 나오고, 일각에서는 양자토론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TV토론을 통해 문재인의 오만, 홍준표의 바닥, 안철수의 집착, 유승민의 까칠함, 심상정의 막무가내 기질을 충분히 보았다. 정책 검증은 실종됐지만 대통령의 가치관과 품성을 파악하기에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