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에게 일자리를/청년이라 죄송합니다]2부 ‘노오력’ 내비게이션
‘고추스펙.’
모르는 사람들끼리는 맨정신으론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한 이 단어를 계속 쏟아내야만 하는 난상토론이 15일 동아일보 사옥에서 벌어졌다. 남자 4명, 여자 4명 모두 취업을 앞두고 있거나 연거푸 취업에 실패한 청년들. 이들은 복면을 쓰고 ‘고추’ ‘고추스펙’을 연발하며 난상토론을 시작했다.
“고추를 차라리 페퍼(pepper)라고 하면 안 되나요?” 수줍게 운을 뗀 남녀 참가자들은 점점 격정적인 발언을 쏟아내더니 2시간이 넘도록 토론을 이어갔다.
○ 1라운드 “고추스펙 존재하나?”
대학에서 페미니스트 운동을 한다는 여자 1호가 포문을 열었다. 얼마 전 서류전형에서 또 탈락한 여자 선배가 술을 마시다가 “얘들아, 요새는 고추도 스펙이다”라고 푸념했다고. 이제 갓 취업준비생이 된 그녀는 “불안하다”고 말했다.
바로 맞은편 남자 1호가 “절대 제 의견은 아니에요”라는 말과 함께 받아쳤다. “향우회에서 만난 증권사 임원이 그러더군요. 육아휴직이 부담된대요. 조직문화에 적응하는 것도 남자보다 느리고…. 직장생활을 학점으로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자 갑자기 욕설이 튀어나왔다. 여자 1호의 반격. “개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여자 2호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육아를 여성의 전유물로 보는 태도가 우습네요. 여성은 모두 ‘애 낳는 생명체’인가요? 같은 여성이어도 난임, 레즈비언, 딩크족 등 상황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 존재해요. 이들은 아이를 낳지 않아요. 그런데 생물학적인 이유 때문에 기피한다고요?”
○ “납득이 안 돼, 납득이”
남자 2호가 손을 들었다. “고추스펙 유무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죠. 누구나 인정하잖아요? 그럼 이유부터 따져봐야죠. 납득할 만한 이유가 맞는지….”
여자 3호도 거들었다. “조직문화에 남자가 적응을 잘한다고요? 성적 농담에 눈감고,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을 따르는 게 정상인가요?” 현재 인턴십을 하고 있는 그는 “상관이 사적인 일을 맡겨 거절했더니 남성 동료가 불러 ‘군대 다녀왔으면 알 텐데, 그럴 때 싫다고 하는 거 아니다’라고 훈계하더라”고 말했다.
여학생이 많은 학과에 다닌다는 남자 3호는 ‘고추스펙’ 문제의 핵심 원인이 육아휴직이라고 꼽았다. “정부가 아무리 돈을 줘도 기업의 손해를 전부 보전하지 못해요. 결국 ‘여성 채용=더 낮은 생산성’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수밖에 없죠.” 실제 인사담당자들은 출산과 육아휴직이 큰 부담이라고 입을 모은다. 26일 취업포털 사람인이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인사담당자 1006명 중 84.5%는 ‘출산 및 육아휴직에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대체인력 비용이 발생하고, 업무에 차질이 발생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휴, 개저씨(개+아저씨).” 여기저기서 탄식이 쏟아졌다.
○ 여성고용할당제 답 될까?
한동안 말이 없던 남자 4호가 말했다. “여성고용할당제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제 수단을 동원하면 해결될까요?” 그는 최근 신입사원의 40% 이상을 여성으로 뽑는다는 대기업 L사를 예로 들었다.
남자 2호가 대꾸했다. “지금까지 남성들은 ‘여성 차별’의 콩고물을 얻어먹던 존재예요.(웃음) 그런데 그런 변화에 동조할까요? 안 될 것 같은데….”
여자 4호가 팔짱을 낀 채 맞받아쳤다. “할당제는 우리도 반대해요. 몇 %를 할당해줄 건데요? 30%? 만일 여성들 능력이 뛰어나 공정한 경쟁에서 50%를 차지할 수 있다고 한다면 20%는 할당제 때문에 탈락하게 되잖아요. 적선하듯 일자리를 나눠주는 건 싫어요.”
전문가들은 할당제보다 중요한 건 채용의 투명성이라고 강조한다. 조혜련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면접위원으로 남녀 동수가 들어가거나, 응시자와 합격자 성비를 공개하는 등의 방법으로 공정한 채용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복면 대담자들은 뜨거운 논의를 벌였지만 합의점을 찾아내진 못했다.
“싸움처럼 끝난 거 같지만, 사실 이런 대화가 있어야 차별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아요. 채용 장벽에 대한 여성들의 불만을 너무 ‘꼴페미’로 취급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남성 대 여성의 싸움이 아니잖아요.”(여자 2호)
“하긴, 여성 생산성이 결혼 후 급감한다는 게 증명된 바 없죠. 기자님, 기사에 꼭 써주세요. ‘사회학자들이여, 기혼 여성의 생산성에 관한 연구 좀 열심히 해주세요’라고.”(남자 2호)
김수연 sykim@donga.com·최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