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종의 파란만장 야구인생 고3 때 결승서 끝내기 허용 눈물, 4억3000만원 받고 입단했으나 얼마 안돼 팔꿈치 수술 2년 허송 팀 나와 골프 도전했으나 또 좌절… 재수술로 돈 떨어지자 온갖 알바 재입단했지만 이번엔 어깨통증, 타자 전향 3년만에 드디어 빛봐
‘눈물의 에이스’에서 진정한 선수로 돌아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부상 등으로 많은 좌절을 겪었던 LG 이형종은 올해 타자로서 맹타를 휘두르며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팬들은 타격과 도루 능력에 투지까지 갖춘 그에게 ‘광토마’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동아일보DB
“정말 체력적으로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말 그대로 미친놈처럼 공만 친 것 같아요.”
3개월도 안 돼 70대 타수에 진입했다. 6개월 만에 세미프로 테스트에 나갔다. 이틀간 열린 테스트에서 첫날은 무사히 통과했다. 그런데 둘째 날 커트라인에 한 타 모자란 78타를 치면서 탈락했다. 그토록 싫었던 야구가 그리워졌다. 나오긴 쉬웠어도 되돌아가는 건 어려웠다. 무엇보다 여전히 팔꿈치가 아팠다. 그는 2011년 혼자 미국으로 건너가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다.
그의 야구 인생이 처음부터 험난한 건 아니었다. ‘야구 천재’ 소리를 들었던 그는 실패를 모르고 자랐다. 초중학교 때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 이끌었다. 첫 번째 시련은 서울고 3학년이던 2007년 열린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었다. 광주일고와의 대결에서 그는 9회말 끝내기 안타를 맞았다. 에이스이던 그는 마운드에 털썩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의 에이스’란 별명이 붙었다. 이형종은 “어릴 땐 유독 승부욕이 강했다. 볼링이건, 당구건 무조건 이겨야 했다. 그런데 그날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력감과 분노가 뒤섞여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기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LG는 1차 지명 선수인 그에게 계약금으로 4억3000만 원을 안겼다. 봉중근 등 선배 투수들은 “진짜 물건이 하나 들어왔다. 한국 최고 투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팔꿈치였다.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술대에 올라 2년을 허무하게 보냈다. 2010년 초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팀을 비난하는 글을 올려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해 5월 16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시속 150km가 넘는 빠른 공을 던지며 승리 투수가 된 기쁨도 잠시. 또다시 팔꿈치 부상이 도졌다. 그는 야구를 포기했다.
○ 세상에서 간절함을 배우다
밖은 추웠고 냉정했다. 골프를 배우고, 미국에서 팔꿈치 수술을 받느라 있던 돈을 다 써버렸다. 생활을 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2012년 처음 얼마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호프집 등을 전전하며 서빙을 했다. 주 6일, 하루에 10시간 넘게 일해도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100만 원이 조금 넘었다. 하루 쉬는 날엔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야구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에 나와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더 힘들게 산다는 걸 알게 됐다. 다시 야구를 하게 되면 모든 걸 쏟아부어야겠다는 간절함이 들었다”고 했다.
○ 돌고 돌아 진짜 야구 선수로
그는 타격할 때 다리를 높이 들고 친다. 교과서적인 자세와는 관계가 멀다. 하지만 그런 폼으로도 정확히 타격 타이밍을 잡는다. 포수 정상호는 “SK 최정이 상황에 따라 다리를 들면서 친다. 최정을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이형종도 천재더라”라고 했다. 양상문 감독도 “투수 때 와인드업을 많이 해봤기 때문인지 어려움 없이 타이밍을 잡는 것 같다. 여러 가지 일을 겪은 선수라서 그런지 모든 플레이에 절실함이 느껴진다”고 했다.
요즘 이형종은 자나 깨나 야구 생각이다. 경기 후에도 그의 야구는 이어진다. 그는 “집에 가면 내 플레이를 다시 한 번 화면으로 돌려본다. 잘 친 타격은 10번 넘게 보기도 한다. 그렇게 복습하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지 않으면 괜히 불안하다”며 웃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