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사인의 스포츠다. 특히 포수와 투수는 ‘무언의 언어’인 사인으로 수많은 의사교환을 한다. LG 포수 정상호가 27일 잠실 SK전에서 투수 임찬규에게 손가락으로 사인을 내고 있다. 잠실 | 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조범현의 야구學’ 3번째 주제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사인의 세계다. 투수와 포수 그리고 벤치가 주고받는 사인은 그라운드의 철칙과도 같다. 승부의 향방을 쥐고 있는 ‘또 하나의 언어’인 사인. 그 탄생과 변화과정 그리고 이에 얽힌 뒷이야기에 대해 야구기자 2년차 고봉준 기자가 묻고, 조범현 전 kt 감독이 답했다.
Q : 사인과 볼 배합을 두고 많은 이들이 포수와 배터리코치, 사령탑을 거친 조 전 감독을 전문가로 꼽습니다. 대체 사인은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나요.
A : 일단 사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팀의 공동 사인입니다. 이는 모두가 숙지해야하는 철칙이죠. 또 하나는 투수 개인별 사인입니다. 투수는 저마다 갖고 있는 공이 다르기 때문에 사인 역시 천차만별이죠. 개인별 사인의 경우 해당투수와 포수진은 이를 따로 숙지해 경기에 활용해야합니다. 다만, 이 둘은 호환이 가능합니다. 우리 패가 상대에게 노출됐다고 판단되면 즉시 둘을 바꿔 사용하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약속을 정하는 시점은 스프링캠프입니다. 여기서부터 내부적으로 사인을 정하죠. 이후 연습경기와 시범경기를 통해서 사인이 완성됩니다.
A : 워낙 종류가 많아서 다 언급할 수 없지만 일단 세 가지 정도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야구계에서 흔히 쓰는 용어로 키 사인, 플러스 사인, 몸 사인이 있습니다. 키 사인의 경우 ‘엄지손가락을 핀 다음 동작’, ‘주먹을 쥐고 난 다음 동작’처럼 특정 제스처 이후 나오는 동작을 진짜 사인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일컫습니다. 플러스 사인은 말 그대로 더하기입니다. 손가락을 하나 펴자마자 두 개를 추가로 피면 세 개가 되죠. 이러면 ‘3’에 맞춘 구종을 던지라는 뜻입니다. 3이 커브일 경우 투수는 해당 구종을 던지게 되겠죠. 몸 사인은 신체 구석구석을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손목부터 팔꿈치, 어깨, 포수 마스크 등 다양한 부위를 만지는 사인입니다. 몸을 쓰는 이유는 간혹 시력이 좋지 않은 투수들을 위함이죠.
포수 사인. 고척 |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Q : 자세한 설명을 들을수록 참 복잡한 세계로 느껴집니다. 선수와 코치들 역시 공통의 사인을 숙지하는 일이 쉽진 않아 보입니다.
A : 사인이란 약속이 참 어려운 이유는 상황별로 세분화돼있기 때문이죠. 약속한 대로만 경기를 진행하면 문제가 없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큰 변수는 주자의 유무입니다. 누상에 주자가 없다면 기존 약속대로 한 번에 사인을 내면 됩니다. 그러나 주자가 나가면서부터 사인이 복잡해지죠. 일단 1루에 주자가 나갈 경우 포수는 1루주자가 나를 보고 있는지 꼭 확인해야합니다. 안 보는 척하면서도 주자의 눈은 포수의 손가락을 향해있기 때문이죠. 이때 포수는 오른쪽 다리로 손가락을 잘 숨기면서 사인을 내야합니다. 앉는 자세와 위치 역시 신경을 써야합니다. 주자가 2루에 있는 경우도 조심스러운 상황이죠. 최근엔 이러한 일이 줄었지만, 과거엔 2루주자의 ‘사인 훔치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투수와 포수는 더욱 복잡하게 사인을 주고받아 주자가 알아채는 일을 방지해야합니다.
Q :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사인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궁금합니다. 1980년대 초창기와 비교해봤을 때 30여년이 흐른 지금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Q : 현대야구로 넘어오면서 수비시프트는 빼놓을 수 없는 경기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투·포수의 사인은 수비시프트와 직결될 수밖에 없을 텐데요. 이 두 가지를 함께 조율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A : 딱 잘라 말하면 수비시프트가 우위에 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수비수들이 위치를 먼저 잡은 다음 볼 배합 사인이 결정됩니다. 상대타자 유형에 따라서 이에 맞는 수비시프트가 선행됩니다. 이 때문에 포수는 늘 수비위치를 신경 쓰면서 타자를 상대해야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쉽지는 않습니다. 수비가 왼쪽으로 치우쳤다고 해서 타자에게 늘 몸쪽공만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수비시프트와 볼 배합의 딜레마이긴 한데 여기서 포수의 능력이 발휘가 되곤 합니다.
Q : 포수의 능력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그렇다면 경기에 들어간 뒤로는 투·포수 사인의 주도권을 누가 쥐는지 궁금합니다.
A : 기본적으로는 포수의 몫이 가장 큽니다. 그러나 포수가 신예급이면 배터리코치가 관여를 하게 됩니다. 벤치 창구를 배터리코치로 단일화하는 이유는 투수코치가 함께 관여할 경우 혼란이 올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일단 상대 타자의 당일 컨디션을 가장 잘 파악하는 선수가 바로 옆에 있는 포수입니다. 타자가 이날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어떤 구종을 노리고 있는지, 배터박스 안에서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지 등 덕아웃에선 알 수 없는 상황을 포수는 알고 있습니다. 포수의 경험과 노련함은 사인을 결정하는데 있어 막대한 몫을 차지합니다. 포수가 베테랑이면 감독은 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반면, 경험이 부족한 포수는 벤치가 사인에 관여하게 되죠. 저 역시 감독 시절 이러한 기준을 두고 포수진을 운용했습니다. ‘한국시리즈 우승 뒤엔 좋은 포수가 있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