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호 전문기자의 人]‘템플 스테이 명찰’로 키운 해남 미황사 금강스님
금강 스님이 27일 미황사 템플 스테이 참가자들과 함께 즐겨 찾는 달마산 중턱 바위 지대에 올라 멀리 서남해를 바라보고 있다. 금강 스님은 “이곳에서 맑고 청량한 기운을 깊이 들이마시는 장호흡을 하다 보면 속세의 번뇌를 잊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해남=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윤영호 전문기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평생 큰소리 한 번 낸 적이 없는 큰스님이었기에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다. 순간 정신이 아뜩해져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몸 둘 바를 모르고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해 방문을 열고 나왔으나 큰스님이 만족할 만한 해답이 떠오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월경 전남 장성군 백양사. 당시 88세였던 서옹 큰스님이 금강 스님(54)을 향해 호통을 친 것이다. 큰스님이 전날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라”고 지시했으나 금강 스님이 뚜렷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계종 제5대 종정을 지낸 큰스님은 현대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선승으로 꼽힌다.
과연 몇 명이나 올까 걱정도 됐지만 다행히 첫 회에 40명이 모여들었다. 주로 신문 광고를 보고 온 사람들이었다. 표정만 봐도 정신적으로 힘든 그들의 상태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스님은 이들과 4박 5일간 함께 지내면서 참선과 산행을 하고 법문도 들었다. 스님의 운명은 그때 결정됐다.
“30년간 일한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한 후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한 참가자가 마지막 날 회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반성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냈는데 그게 잘못이었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듣고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도 사람을 살릴 수 있겠구나. 평생 이런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금강 스님이 5개월간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경험은 2000년 전남 해남의 천년 고찰 미황사 주지를 맡은 이후 이 사찰을 템플 스테이 명소로 키워 내는 밑거름이 됐다. 미황사는 이에 힘입어 전국적인 명찰(名刹)의 반열에 올랐다. 미황사는 이제 속세의 고뇌를 안고 찾아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의 터전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우리나라 육지 사찰 가운데 최남단에 위치한 미황사를 찾는 사람은 관광객을 포함하면 매년 1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대한불교 조계종 불교문화사업단에 따르면 이 가운데 템플 스테이 참가자는 지난해의 경우 외국인 323명을 포함해 3002명이었다. 전남지방의 유서 깊은 대찰인 백양사(1411명)나 송광사(2205명), 대흥사(1776명)보다 더 많다.
스님은 접근성이나 지명도에서 뒤떨어지는 미황사의 템플 스테이를 차별화하는 차원에서 다양한 형태를 도입했다. 1년 365일 사찰을 일반에 개방하기로 하고 말 그대로 단순히 하룻밤 묵는 사람도 언제든 환영이다. 그뿐 아니라 매월 한 차례 7박 8일간 진행하는 집중 수행 형식의 템플 스테이도 운영한다. ‘참사람의 향기’다.
2005년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2월에 100회를 돌파했다. 당시까지 참가 인원은 총 1875명. 8일 동안 묵언하면서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하고 12시간의 참선과 다도, 요가, 울력 등 단기 출가를 경험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스님은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수행하러 온 사람들에게 온 정성을 쏟는 미황사 식구들 덕분”이라고 고마워했다.
물론 스님이 템플 스테이를 처음 시작하려고 할 때만 해도 주위의 반응은 싸늘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 체험 기회를 제공하려는 차원에서 템플 스테이 사찰을 모집한다는 조계종 포교원의 공고를 보고 신청했으나 오히려 웃음거리가 됐다. “그 먼 미황사까지 찾아갈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는 비아냥도 들었다.
그러나 스님은 자신 있었다. 2000년 일종의 어린이 산사 체험 프로그램인 초등학생 한문학당을 시작하면서 세면장과 화장실, 침실 등을 갖췄고 다도나 예불, 참선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외국인에게 맞게 적용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백양사에서의 경험도 내세울 만했다.
괘불재(掛佛齋)와 산사음악회, 해맞이·해넘이, 어르신 노래자랑 등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프로그램도 미황사가 자랑하는 소프트웨어다. 매년 10월에 높이 12m, 폭 5m의 대형 괘불 탱화(보물 1342호)를 모셔 놓고 진행하는 괘불재는 그해 농사지은 쌀이나 콩, 또는 자신이 쓴 논문이나 책 등 1년의 성과물을 올리는 만물공양이 하이라이트다.
“2000년 가을에 지역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는 산사음악회를 마련해 주변 지역에 내려오는 들노래나 강강술래, 용 줄다리기 등을 선보였다. 들노래 같은 경우 문화재로 지정돼 있었지만 공연할 기회가 없었는데 미황사 마당을 공연장으로 제공한 셈이다. 그러다 3회째부터는 음악회만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듯해 같은 날 괘불재도 함께 하고 있다.”
지역사회와 공생하려는 스님의 생각은 미황사 아랫마을 작은 학교 서정초등학교 살리기에서도 결실을 보았다. 1965년 군곡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서정분교로 출발한 이 학교는 한때 학생이 1000명이 넘어 서정국민학교로 독립하기도 했지만 2003년엔 5명으로 줄어 폐교 위기에 직면했다.
“폐교 예정 소식을 듣고 너무 안타까워 서정분교 살리기 모임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교육청 및 학부모들과 함께 인근 지역 학생들을 유치하고 다른 학교에 없는 특성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나도 인연이 있는 숲 해설가들을 초청해 1주일에 한 번씩 숲 해설을 부탁했다. 또 멀리서 통학하는 학생들을 위해 스쿨버스를 마련하는 데도 발 벗고 나섰다. 가수 노영심 씨도 취지에 공감해 CD 판매 대금을 보태기도 했다. 지금은 학생 수가 늘어나 2015년 3월엔 다시 서정초등학교로 승격됐다.”
금강 스님의 소프트웨어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든든한 하드웨어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드웨어 정비는 현공 스님이 맡았다. 그는 1990년부터 10년간 주지로 일하면서 중창불사 원력(願力)을 세워 폐가와도 같았던 미황사를 ‘땅끝마을 아름다운 사찰’로 변모시켰다. 두 사람은 법정관리 중인 기업과 비슷한 처지였던 이 사찰을 물려받아 우량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셈이다.
“1989년 무렵 처음 미황사에 와 보니 겨우 전각 2동과 임시 요사채 건물 두 동이 있었다. 은사 지운스님과 함께 나무를 베고 축대를 쌓는 일부터 시작했다. 중앙승가대학 입학을 위해 1991년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2년간 지게만 지고 일을 했더니 마을 사람들이 ‘30∼40년 지게를 진 우리보다 더 낫다’면서 ‘지게 스님’이라는 별명을 지어 줬다.”
스님은 세계적인 선 스승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그는 3월 처음 방한한 미국의 대표적인 선 지도자 노먼 피셔의 초청에도 관여했을 뿐 아니라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방한추진위원회 상임 대표도 맡고 있다. 2013년 ‘인류의 영적 스승’으로 불리는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이 세 번째 방한했을 때는 15일간 가까이서 그를 모시기도 했다.
“한국 불교에도 선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오지만 현재 한국인들의 직접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부족한 듯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반면 피셔만 해도 비즈니스, 테크놀로지, 호스피스 프로젝트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선 불교를 적용해 왔다. 달라이 라마까지 방한한다면 한국 사회와 한국 불교에 큰 자극이 될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늦어도 내년엔 방한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17세 때인 고교 1학년 재학 중 해남 대흥사에서 출가한 금강 스님은 한때는 유명한 운동권이었다. 전두환 정권 말기 광주원각사 청소년지도법사로 있을 때 시위 진압 경찰(이른바 백골단)이 법당에까지 쳐들어와 최루탄을 뿌리는 것을 보고 공분을 느낀 게 계기였다. 1987년 민주항쟁 때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광주전남본부 집행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선 종단 개혁 운동에도 힘을 보탰다. 서의현 당시 총무원장의 3선 연임 직후 일어난 종단 개혁 움직임을 원로 스님들과 함께 이끌었다. 또 민족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등에도 관여했다. 그러다 자신이 감당하기엔 벅찰 뿐 아니라 스스로도 공부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1996년 다시 미황사로 내려온 이후 인간 본성의 회복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서옹 큰스님은 환경 파괴나 핵무기 등으로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하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수행을 통해 원래의 참사람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 자기 안의 부처를 회복해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금강 스님은 “미황사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넓어졌다”고 말한다. 미황사를 이 시대에 맞는 수행 공동체로 발전시키려고 ‘욕심’을 내는 이유다. 그는 그것이 산중 사찰의 현대적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불교계 안팎에서 “금강 스님이 산중 불교의 새로운 모색과 가능성을 보여 준다”고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전 미황사 자주 찾았던 ‘무소유’ 법정스님▼
금강 “미황사에 대한 글은 왜 안 쓰시나요”… 법정 “감춰 두고 싶을 만큼 내가 좋아해서”
김영택 화백이 그린 미황사 펜화.
달마산의 품에 안긴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세워졌다. 중국 송나라 때는 중국에도 알려질 만큼 큰 절이었지만 100년 전 갑자기 쇠락했다가 2000년대 들어 현재의 모습을 회복했다. 천년 고찰 미황사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와 서해의 장엄한 낙조는 잠시나마 속세의 번뇌를 잊게 해준다. 절 바로 아래 펼쳐진 동백나무 동산도 아름답다.
‘무소유’의 철학으로 유명한 법정 스님도 생전에 미황사를 자주 찾았다. 금강 스님은 “언젠가 스님에게 ‘미황사에 대한 글은 왜 안 쓰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좋아하는 만큼 홀로 감춰두고 싶다’고 웃으며 답했다”고 전했다.
금강 스님 역시 법정 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흥사에서 출가한 직후에는 법정 스님의 책을 탐독했다. 금강 스님이 월간 ‘불광’ 등 불교계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보이는 문재(文才)도 이때 갈고닦은 것으로 보인다. 금강 스님이 오랫동안 사숙하던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2년이었다. 법정 스님은 금강 스님과 동향이다.
“법정 스님이 인천에서 차(茶)에 대해 강의할 때 직접 참석해 처음 인사드렸다. 그 뒤로도 서너 번 보긴 했지만 가까이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것은 96년 이후부터다. 당시 미황사에 있을 때였는데 해남군 옥천면 백호리 저수지를 지나다가 여기에 예쁜 백련(白蓮)이 가득 피어있는 것을 보고 법정 스님에게 연락했더니 강원도에서 한걸음에 달려왔다. 법정 스님은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백련을 보러 왔고, 그때마다 미황사에 들렀다.”
금강 스님은 법정 스님이 입적하기 하루 전날에도 그를 찾았다. 금강 스님이 “스님, 고향에는 동백꽃이 만발했습니다. 매화도 꽃망울을 터뜨렸고요. 쾌차하셔야죠”라고 말하자 법정 스님은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금강 스님이 법정 스님 생가 복원사업에도 관여하는 것은 법정 스님과의 이런 인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이 태어난 곳은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일명 뱃머리다. 조선 후기 우수영진이 쇠약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판옥선이 줄을 잇던 곳이다. 해남군에서는 법정 스님 생가와 주변 집 등 3채를 사서 복원 사업을 추진 중이다. 금강 스님은 “법정 스님이 손수 마련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송광사 불일암 같은 암자와 조그마한 도서관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윤영호 전문기자 yyoung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