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형권 뉴욕 특파원
“한미 관계에서 관행적으로 쓰는 ‘철벽공조’란 외교적 수사(修辭)를 싫어한다. 나라가 다르고, 국익도 다른데 어떻게 철벽처럼 빈틈없이 공조가 되나. 한쪽의 이해를 다른 쪽이 그대로 따라갈 때나 ‘철벽공조’가 가능한 것 아닌가.”
2000년 처음 만난 북미국장 송민순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북미통이면 “한미동맹 철벽공조 이상 없습니다”만 앵무새처럼 외칠 것이란 내 선입견이 깨졌다. 그는 늘 “외교관은 목이 뻣뻣할 수밖에 없다. 남의 말에 승복하는 게 아니라 남을 설득하는 게 직업이기 때문이다. 외교관이 ‘예,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다음부터 잘하겠습니다’라며 고개 숙이면 나라가 어찌 되겠나”라고 말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송민순을 중용한 것도 같은 이유다. 당시 청와대와 외교안보팀 일각에선 “대통령에게도 대들 사람”이라며 반대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그래도 송민순이 진정성은 있잖아”라고 옹호했다.
그런 송민순이 노 전 대통령의 계승자를 자임하는 여론조사 1위 대선 후보와 ‘진실 공방’을 벌이면서 허위사실 유포 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까지 됐다. ‘색깔론 유포자’ ‘거짓말쟁이’로 공격받기도 한다. 적과 아군밖에 없는 전쟁 같은 대선이 송민순을 송두리째 삼켜버렸다.
송민순은 문학도(독문학)답게 복잡하고 민감한 외교 현안을 비유적인 표현으로 설명하곤 했다.
“북핵 문제는 한국에는 한민족의 생존이 걸린 문제지만, 미국에는 ‘핵 비확산’이란 세계 전략의 문제다. 미국이 ‘체스판’(비확산 전략)을 꺼내 놓으면 한국은 ‘장기판’(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체스판에선 미국에 판판이 깨질 수밖에 없다. 적어도 미국에 ‘체스 한 번 뒀으면, 다음엔 장기를 두자’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부형권 뉴욕 특파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