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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영의 뉴스룸]잔혹동화가 된 신데렐라 이야기

입력 | 2017-05-02 03:00:00


홍수영 정치부 기자

대선 TV토론회를 지켜보며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2012년 12월, 18대 대선의 첫 공식 TV토론회가 시작되기 직전의 일이다. 박창식 의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방송사 스튜디오 밖 대기실로 나오고 있었다. 드라마 제작자 출신으로 ‘TV 박사’인 박 의원은 후보당 한 명씩 허용된 참관인으로 스튜디오에 들어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토론을 지켜보기로 돼 있었다.

“박 의원, 나오면 어떡해!”(캠프의 한 참모)

“조윤선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이 들어가겠다고 해서….”(박 의원)

참관인은 긴장감이 팽팽한 토론회장에서 후보가 심리적으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후보를 가까이에서 보좌하겠다는 조 대변인의 집념에 대기실에 모인 10여 명의 참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조 친박(친박근혜)’을 제치고 첫 여성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두 번의 장관직을 꿰찼던 박근혜 정부의 ‘신데렐라’, 조윤선의 탄생이었다.

기자는 2009년 초선 의원이던 조 전 장관을 처음 봤다. 당 대변인으로 정치무대의 최전선에 있으면서도 참 말간 얼굴이었다. 사석에선 오페라를 말하고 시조를 읊던 그는 예술을 하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조 전 장관에게 “권력 의지가 없어 보인다”며 조언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가 대권을 목전에 둔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면서 달라졌다. 조 전 장관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권력 의지가 발동했을 수도 있고, 권력이 조 전 장관을 그렇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다 옛일이 됐다. 레임덕을 모를 것 같던 권력의 말로는 신데렐라도 철창신세를 지게 했다. 권력은 난로와 같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춥고, 너무 가까이 있으면 델 수 있다. 역대 어느 정부의 이른바 ‘실세’들도 이 명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이상한 점도 있다.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데도 권력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혈안일 뿐, 리스크 관리를 위해서라도 대통령에게 ‘바른말’했다는 참모는 거의 못 들어봤다. 물론 최고 권력에게 감히 훈수를 둘 ‘용자(勇者)’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비서관을 지낸 한 다선 의원은 “대통령 집무실 앞에 비치된 거울을 보며 매번 ‘오늘은 꼭 할 말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문을 열면 저 멀리 큼직한 책상에 앉아 있는 대통령에게 기가 눌려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가더라”라고 털어놨다.

그러나 잘 알던 청와대 사람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차는 모습을 보고 나니 새 정부의 ‘참모 후보’들에게 단단히 부탁하고 싶다. 일주일 뒤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 또 누군가는 권력의 신데렐라로 떠오를 것이다. 유력 후보의 캠프에선 후보가 참석하는 회의가 열리면 기막히게 소식을 알고 달려와 눈도장을 찍는 의원들이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신데렐라가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인이 권력을 탐하는 것까지 탓하진 않겠다. 다만 대통령에게 바른말을 해서 미움을 살지언정 잘못된 길로 드는 것을 막지 못해 불행해지는 일은 없기를.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쓴소리를 하는 참모도 품을 수 있는 지도자의 아량이다.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

홍수영 정치부 기자 gae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