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사망자 2000명 줄이자/시즌2]<6> 주한 영국대사 부인의 쓴소리
“러시안룰렛 같아요.”
찰스 헤이 주한 영국대사의 부인 파스칼 서덜랜드 씨(51)는 ‘횡단보도 건너기’를 이렇게 비유했다. 물론 영국이 아닌 한국 상황이다. 러시안룰렛은 총알 1개가 장전된 리볼버(회전식) 권총을 돌아가며 겨냥해 발사하는 걸 말한다. 이른바 ‘죽음의 승부차기’다. 서덜랜드 씨는 한국의 도로에서 러시안룰렛의 공포를 느꼈다고 털어놨다.
○ 70대 중 단 1대만 횡단보도에서 멈췄다
서덜랜드 씨가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횡단보도였다. 그는 한국에서 두 딸을 외국인학교에 보내고 있다. 서덜랜드 씨는 “애들이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널 땐 차량을 향해 멈추라는 의미로 손을 뻗는다”고 말했다. 사람이 횡단보도 앞에 서있어도 차량이 좀처럼 속도를 늦추지 않는 탓에 나온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서덜랜드 씨와 함께 관저에서 나와 근처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 갔다. 관저에서 직선거리로 250여 m 떨어진 세종로파출소 앞이다. 이곳은 왕복 3차로로 도로 폭이 9m가 채 되지 않는 좁은 이면도로의 진입로다. 파출소 양옆에는 면세점 건물과 호텔이 있고 횡단보도에서 약 85m 떨어진 곳에 지하철역도 있어 유동인구가 많다.
보행자들은 길을 건너기 전 횡단보도 앞에 서서 도로 양쪽을 살폈다. 하지만 대부분의 차량은 길을 건너려는 보행자를 보고도 속도를 별로 늦추지 않고 진입로로 ‘돌진’하다시피 했다. 한 관광객은 횡단보도에 이르기 직전 급정거하는 차를 보고 ‘위협’을 느꼈는지 몸을 움츠렸다. 횡단보도 앞에 있던 약 20분간 보행자들을 보고 먼저 멈춘 차량은 70여 대 중 1대뿐이었다.
“영국에서는 횡단보도 앞에 보행자가 서있으면 차량들이 일단 멈춥니다. 도로에서는 약자인 보행자를 항상 우선적으로 보호한다는 안전의식이 뿌리내린 것이죠. 아이들 등굣길에 같이 가곤 하는데 학교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갈 때 차량이 속도를 늦추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럴 때면 애들이 도로 가장자리에 붙어서 갑니다.”
최근 서덜랜드 씨는 한 이화여대 제자가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칠 전에는 한국 지인의 이웃 자녀가 사고를 당해 다친 이야기도 접했다. 그는 “보도가 없는 골목길에서 속도를 늦추지 않는 차량도 아찔하지만 곡예하듯 달리는 오토바이도 위험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택시를 탄 경험도 소개했다. 서덜랜드 씨는 한국인 지인과 함께 택시 뒷좌석에 함께 타자마자 평소 습관처럼 안전띠를 맸다. 그러자 지인은 “뭐 하러 안전띠를 매냐. 안 해도 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서덜랜드 씨는 “지나가는 말이었겠지만 한국인들이 안전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2015년 기준으로 한국의 뒷좌석 안전띠 착용률은 22%에 그치고 있다. 영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의 뒷좌석 안전띠 착용률은 평균 80%가 넘는다.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안전띠를 매지 않을 경우 맸을 때보다 치사율은 최대 12배 높다. 현재 뒷좌석 안전띠 착용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국회에 발의됐지만 아직도 계류 중이다.
서덜랜드 씨는 “영국도 처음엔 안전띠가 생활화되지 않았다”며 “1970년대부터 지속적인 안전띠 착용 캠페인 등을 통해 안전의식 변화를 이끌었기 때문에 지금의 교통안전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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